고려 제11대 국왕 문종(文宗, 1020 ~ 1083)은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 아들로 이름은 낙랑군 휘(徽)이다. 재위기간은 1046년 6월부터 1083년 9월까지 37년 3개월이다. 문종은 아버지 현종과 형들인 덕종과 정종을 이어서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고려의 최고 황금기를 이끈 성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문종의 대외정책, 주요 인물, 문종의 가족과 사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대외 정책
· 요나라(거란)와의 관계
1054년, 고려 문종은 맏아들 왕휴를 태자로 삼은 뒤 김양지를 책봉 사절로 요나라에 보내는 등 형식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거란은 고려의 국력이 강성하게 되자 더 이상 침략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해 7월 요의 병사들이 압록강 일대에 우정(역참)을 설치한다는 보고를 받은 고려의 문종은 요나라에 고려의 옛 영토를 반환하고 성벽 등 일체 시설을 철거하라고 강력히 요구한다. 1057년에도 문종은 궁구문 밖의 우정을 없애고, 송령 동북지대에 개간을 하는 자들과 설치한 암자들을 철폐하라고 요구한다.
· 북송과의 관계
요의 압력으로 한때 국교가 단절되었지만 문종은 북송 상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인다. 또 북송의 주자감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유능한 송인들을 귀화시켜 관리로 임용한다. 이런 사람으로는 장정, 장완, 노인유, 진위, 소정, 소천, 섭성 등이 있다. 당시 북송은 고려와 연합하여 양자강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려는 북송을 통해 요를 견제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적인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 국제무역항 벽란도
1078년 예성강 유역의 벽란도를 통해 북송과 고려의 국교가 80년 만에 재개된다. 이때부터 예성강 유역의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이 되어 한중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본 상인들도 뛰어들었다. 고려는 북송의 비단과 서적 등을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의 나전, 유황, 부채, 칼 등을 북송으로 수출하는 중계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다.
· 여진과 일본의 관계
문종은 거란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여진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육지와 해상의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1046년 동남해안에 동보를 설치하고 군량을 확보한다. 1047년 서북지방에 전투장비를 지급하여 여진에 대비하고, 서경을 지키는 맹군과 해군의 영에서 각 300 명씩 선봉군을 선발해 해적 침투에 즉각 출동하도록 한다. 1050년 문양열이 23척의 수군선단을 이끌고 추자도 부근 해적을 소탕한다. 1051년 여진족이 귀주와 창주에 침입하자 유음기광군이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여 적의 도발에 신속대응하게 한다. 1058년 돌격 부대인 사면기광군을 창설하여 여진족의 게릴라전에 대비한다. 그 후 1069년 박원작이 쇠뇌를 개선하여 수질구궁노라는 무기를 개발하고, 개경의 네 곳에 숯을 보관하는 쇠창고인 고수탄철고를 설치한다. 1080년에는 문정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정주성 외곽에 여진족을 토벌한다. 이러한 강경책 이외에 문종은 다음과 같은 유화책을 실시하였다. 1073년 4월, 동북 변방 밖의 여진인들이 귀순하여 군현설치를 요구하였으며, 또 서여진의 추장 만두불 등이 주군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평로진 인근의 여진족 골어부와 요결 등이 귀순한다. 이와 같이 북방 여진족들이 고려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북방 지역이 안정되었다. 이와 같이 문종은 외교로 평화관계를 유지하며 여진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군사력 강화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종대의 주요 인물
· 해동공자 최충(984년 ~ 1068년)
최충은 고려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그의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호연이다. 그는 목종부터 문종까지 문하시랑평장사, 도병마사, 문하시중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5명의 국왕을 섬긴 원로 대신이다. 최충은 1005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장에 능하여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서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편찬에 참여한다. 문종 즉위 후 문하시중이 되어 62세에도 불구하고 율령을 정리하고, 서북 주·진의 공역 금지를 청하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한다. 1055년 72세의 최충이 조정에서 물려나 송악산 아래에서 최초의 사립학교인 구재학당(문헌공도)을 설립하여 많은 유학자들을 양성한다. 얼마 후 구재학당 출신들이 과거에 대거 합격하자, 개경에는 12개의 사립학교가 생긴다. 이를 사학 12도라고 불렀으며 그중 최고는 역시 최충의 문헌공도였다. 그러자 지방에서도 사학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최충이 고려 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자 그를 해동공자라고 부르게 된다. 1068년 최충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의 시호는 문헌이다.
· 이자연(1003년 ~ 1061년)
이자연은 고려 문종의 외척으로 문종을 보위하면서 경원(인주) 이씨 가문을 인종 때까지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만들 장본인이다. 문종이 공음전시과를 통해 귀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자, 문벌귀족들이 고려초 호족세력에 이어 고려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귀족들은 김은부의 안산 김씨, 이자연의 경원 이씨, 김부식의 경주 김씨, 윤관의 파평 윤씨, 최충의 해주 최씨 등이 있다. 이자연의 좌복야 이한의 아들로 1024년 우보궐에 임명된다. 그 후 젊은 나이에 우승선과 중추부사 등 조정의 핵심부서를 거쳐 문종이 즉위하자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임명되어, 문하시중 최충과 함께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등장한다. 1050년에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에게 시집을 보내며 1055년에 최고의 실세인 시중이 된다. 최충이 물러나자 이자연은 문종을 도와 흥왕사를 창건하고 북송과 국교를 수립한다. 1061년 이자연이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자연의 아들 11명은 고려의 정계와 불교계를 주도하여 문종의 집권후반기를 주도한다.
가족과 사망
· 가족
문종은 제1비 인평왕후 김씨와 이자연의 장녀 제2비 인예왕후 이씨, 2녀 제3비 인경현비 이씨, 3녀 제4비 인절현비 이씨 그리고 제5비 인목덕비 김씨의 5명의 부인에게서 13남 2녀를 얻는다. 즉 제2비 인예왕후에게서 10남 2녀(순종, 선종(국원공), 숙종(계림공 왕희), 대각국사 의천, 상안공 왕수, 도생승통 왕규(왕탱), 금관후, 변한후, 낙랑후, 총혜수좌, 적경공주, 보령공주), 제3비 인경현비에게서 3남(양헌왕(조선공 왕도), 부여공 왕수, 진한공 왕유)을 낳는다.
· 사망
고려 건국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문종은 1083년 7월 태자 왕훈(순종)에게 선위하고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경릉(景陵)으로 개성시 장풍군에 소재하고 있다.
제11대 문종 1 - 출생과 등극 및 법률제도의 확립, 경정 전시과, 낙랑군 왕휘
제11대 문종 1 - 출생과 등극 및 법률제도의 확립, 경정 전시과, 낙랑군 왕휘
고려 제11대 국왕 문종(文宗, 1020 ~ 1083)은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 아들로 이름은 낙랑군 휘(徽)이다. 재위기간은 1046년 6월부터 1083년 9월까지 37년 3개월이다. 문종은 27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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