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6대 국왕 성종(成宗, 961 ~ 997)은 태조 왕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 태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차남으로 이름은 치(治)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981년 8월부터 997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16년 3개월이다. 981년 경종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이제 만 1살을 갓 지난 아들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가 없어, 사촌동생 개령군 왕치(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왕이 된 성종은 조카 왕송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키운다. 성종은 997년에 병이 위중해지자 조카인 개령군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돌려준다.
성종의 유년시절과 등극
· 어린 시절
성종(成宗, 961 ~ 997)은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사이의 아들 왕욱(대종)과 태조와 정덕왕후 사이의 딸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3남(효덕태자, 성종, 경장태자) 2녀(헌애왕후, 헌정왕후) 중 차남으로 이름은 치(治)이다. 왕치(성종)는 969년에 아버지 대종이 죽자 개령군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마저 사망하자 할머니인 신정왕후에 의해 길러진다. 왕치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하였다.
· 성종의 등극
한편 981년 사촌형인 경종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이제 만 1살을 갓 지난 아들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가 없어, 사촌동생 개령군 왕치(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가 바로 고려 제6대 국왕 성종(成宗)으로, 이때 그의 나이 20세이다. 왕이 된 성종은 조카 왕송을 개령군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키운다.
성종의 업적
· 유교적 통치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유학자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이고, 이후 6두품 계통 유학자를 중용하고 유교를 통치 이념을 삼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또한 중앙인 개경에는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에는 향교(향학)를 설치하여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 유학을 교육하여 충과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뛰어난 인재들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문신월과법을 시행하여 중앙의 문신들은 매월 시 3편과 부 1편을, 지방관은 1년에 한 번 글을 지어 바치게 한다. 선왕을 추모하여 제사하는 종묘와 땅의 신에게 제사하는 사직을 도입하여 실시한다.
· 정치기구 개편
중앙에는 태조 이래의 정치 기구를 개편하기 시작하여 2성(중서문하성, 상서성) 6부제(이, 호, 예, 병, 형,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치 기구를 마련하였고,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그리고 중추원, 어사대, 삼사를 두었다. 지방에는 10도와 12목을 설치하고 그곳에 지방관을 처음으로 중앙에서 파견하고, 향리 제도(호장, 부호장, 병정)를 마련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한다. 성종대에 10도 12목의 지방제도가 이후 현종대에 이르러서야 5도(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양계(동계, 북계)로 완성된다.
· 군사제도 개편
고려의 군사는 개국초에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하는 국왕군과 지방호족이 통제하는 사병으로 되어 있었으나, 고려 3대 정종대에 이르러 지방 호족의 군사로 이루어진 예비군 형태의 30만의 광군이 만들어졌으며 성종대에 와서 중앙군은 2군(응양군, 용호군) 6위(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지방군은 주현군(주,군,현 방어)과 주진군(동계, 북계 방어)으로 체제로 조직된다.
· 팔관회 연등회 폐지 등 민생 안정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예산이 소모되는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였다. 또한 천자가 천제를 지내는 제단인 원구단을 설치하였으며, 노비환천법(광종 때 노비안검법으로 해방된 노비가 주인 모독 시 다시 노비로 환원시키는 법)을 실시하였으며,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인 건원중보를 유통시키는 등 체제 정비와 민생 안정에 힘쓴다.
·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서희의 담판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 동경유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부근을 통해 고려를 침공한다(거란의 제1차 침입). 이에 성종은 친히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가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막는다. 고려는 초기 전투에 봉산군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가 이몽진을 거란으로 보내 내침의 진의를 타진한다. 거란의 소손녕은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이 없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거란에 항복하자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황주와 절령을 국경으로 삼자는 할지론 등의 주장이 등장하더니 할지론으로 기울어진다. 그러자 서희,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니 성종은 이에 따르게 된다. 한편 고려가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자 거란은 화친은 제안한다. 이에 고려 조정은 서희를 급파한다. 결국 "고려는 고구려의 옛땅이다"라는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러가게 한다. 거란과의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흥화진, 통주, 귀주, 곽주, 용주, 철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송나라와는 공식적 외교 관계는 단절하고 동북·서북 지방의 경계에 특히 유의하게 된다. 그러나 송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유지한다. 따라서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된다.
· 성종의 인품
성종은 선왕 경종의 아들 왕송(목종)에게 자신의 '개령군' 봉호를 물려주고 왕송(목종)이 후계자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여 선왕 경종과 친동생 헌애왕후(천추태후)를 배려하였다. 그 결과 성종 사후 왕위 계승다툼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헌정왕후는 모두 선왕 경종의 왕후이지만 경종이 죽자 둘 다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둘째 여동생 헌정왕후가 안종(왕욱)과 정을 통해 사생아 왕순(현종)를 낳자 안종을 경상도 사수현으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고, 이후 헌정왕후가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둘 사이의 아들인 왕순(현종)을 불쌍히 여겨 안종의 곁에서 지내게 한다. 심지어 첫째 여동생 헌애왕후가 왕족도 아닌 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르자 당시에는 당연히 죽여야 하는 김치양을 죽이지 않고 섬으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끝낸다.
성종의 가족과 사망
· 가족
성종에게는 광종의 딸 제1비 문덕왕후 유씨, 김원숭의 딸 제2비 문화왕후 김씨와 후궁인 연창군부인 최씨가 있었다. 2명의 왕비와 1명의 후궁인 3명의 부인에게서 2명의 딸을 낳는다. 즉 문화왕후에게서 딸 원정왕후와 연창군 부인 최씨에게서 딸 원화왕후를 두었으며, 두 딸 모두 현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다.
· 사망
성종은 997년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이 없고 딸만 2명이라 조카 개령군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강릉(康陵)으로, 개성시 진봉리에 소재하고 있다. 성종은 유교적 통치를 강조하며 고려의 중앙 집권적 봉건 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성군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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