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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4대 광종 - 공포정치과 개혁정치 및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쌍기, 균여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2.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 925 ~ 975)은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태조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소(昭)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949년 4월 친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아 975년 7월 사망할 때까지 26년 3개월이다. 광종은 정적인 호적들을 숙청하고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관료의 관복의 색깔을 정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그는 피의 군주인 동시에 실질적인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만든 성군이기도 하였다. 

 

광종의 출생과 등극

· 출생과 어린 시절

광종은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태조의 넷째 아들이며, 정종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소(昭)이다. 왕소는 어린 시절 형인 정종과 함께 이복형 혜종의 왕권을 위협하던 핵심인물이었으며, 평주 호족인 평산 박씨 세력인 박수경, 박수문 형제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또한 서경의 왕식렴과도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혜종은 서경 세력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딸을 광종과 혼인시키기도 한다. 왕소(광종)는 우직한 형 정종(왕요)과는 달리 치밀하면서 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광종의 등극

정종이 즉위하여 서경천도를 강제로 밀어붙이자 왕소는 속으로 불만을 가지게 된다. 왕소는 충주의 호족, 신천 강씨 세력, 평주의 박씨 세력을 끌어들여 개경은 물론 서경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때문에 왕소가 왕권을 노렸다면 정종은 진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945년 정종은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 병에 시달리게 되자,  949년 3월 왕의 자리를 동생 왕소에게 선위 한다. 왕소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이다.

 

 

광종의 절치부심

· 즉위 초반 태평성대

광종의 선왕인 혜종과 정종은 모두 재위 기간 내내 왕규, 왕식렴 같은 호족과 외척 세력들에 의해 왕권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따라서 광종은 즉위 초기 7년 동안에는 발톱을 숨긴 채 자신을 후원하던 충주 유씨, 평산 박씨, 청주 김씨 호족들과 타협하고 회유하면서 몸을 낮췄다. 한편으로는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군주의 위엄을 세우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한 광종은 당태종의 정치술과 제왕학을 담은 지침서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숙독하며 덕치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불교 숭상책 

광종은 팔관회연등회 등 불교 행사를 적극 후원하여 민심을 끌어들인다. 화엄종 승려 균여를 통해 '성상융회사상'을 받아들이고, 화엄종과 법상종을 통합하여 평민들이 신도인 교종을 확산시켜 선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호족들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킨다. 또한 화엄종의 승려 겸신을 국사로 임명한다.

 

· 평가

이와 같이 광종의 초기 치세는 외면적으로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한림원 학자 최승로 "광종의 초기 8년간의 치세는 중국 태평성대인 하·은·주 시대인 삼대(三代)에 견줄만하다"라고 평가하며 극찬한다. 광종은 왕권 회복을 노리며 중국의 후주와의 외교를 강화하여 자신의 역량을 키워 온다. 후주의 사신 쌍기(雙冀)를 귀화시켜 한림학사로 삼은 뒤 과거제도를 실시하는 등 7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고려의 내정개혁에 착수한다.

 

 

광종의 개혁정치

· 노비안검법

 956년(광종 7), 광종은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전격 시행한다. 노비가 호족의 개인 재산에 불과했다면, 양인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주요 생산계층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호족의 재정적 기반과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까지 더 풍족해지게 만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조치였다. 당연히 호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광종은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른바 '왕권강화의 시기'로 불리는 광종 개혁정치의 서막이었다.


· 과거제도
958년(광종 9), 광종은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인재를 시험으로 선발한다. 이는 음서제도를 통해 무시험으로 관리로 등용되던 호족 가문과 그의 후손들의 조정 진출을 차단하게 한다. 특히 광종이 도입한 과거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무려 936년간이나 존속하게 된다. 광종은 쌍기의 총명함을 높이 사서 측근으로 중용했고, 그에게 과거제를 비롯한 고려의 주요 개혁정책을 주도할 브레인 역할을 맡겼다. 광종은 쌍기 외에도 왕융 등 많은 귀화인 출신들을 기용하고 우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다.

 

 

광종의 공포정치

· 관복 제정

960년(광종 11) 1월 쌍기의 조국인 후주가 멸망하고 조광윤에 의해 북송이 건국된다. 광종의 치세 말기에는 이른바 '호족청산과 공포정치의 시대'로 요약된다. 이에 광종은 연호를 준풍으로 정하고 공복 제정을 통하여 관리를 4등급으로 나누고 품계에 따라 관복의 색상(자, 단, 비, 녹)을 다르게 정하여 관료들의 서열을 바로잡아 조정의 기강을 확립한다.

 

· 관제 개편

광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관제를 개편한다. 순군부를 군부로 바꾸어 측근들을 배치하고, 경호부대인 내군을 장위부로 바꾼다. 왕실 운영자금을 위해 물장성을 보천으로 개편한다. 이때부터 광종은 광평성 대신에 한림원내의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한다. 따라서 국왕의 비서실인 내의성이 최고의 기관이 되며, 수상도 내의령이 맡게 된다.

 

· 정적 소탕 및 공포정치

하급관리인 권신에게 내봉성령 준홍과 좌승 왕동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참소를 듣자 광종은 이들을 삭탈관직하고 내쫓는다. 광종은 일방적인 고발만 듣고 뚜렷한 증거 없이 신하들을 처벌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태조의 개국공신이자 평주의 대호족이던 평산 박씨 가문의 박수경은 아들(박승위, 박승경, 방승례)이 역모 혐의로 수감되자 화병을 얻어 사망한다. 또한 광종은 선왕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조카 흥화궁군(혜종의 아들), 경춘원군(정종의 아들)마저도 거짓 역모 혐의에 연루시켜 처형한다. 왕위 계승 명분이 있는 조카들의 존재가 언제든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광종의 폭정은 단순히 호족 숙청만이 아니라 오래된 공신과 장수들, 왕족들에게까지 피바람을 몰고 왔다. 심지어 광종은 친아들 태자 왕주(훗날의 경종)마저 외가와 반역을 모의했다고 의심했으나 아내 대목왕후의 만류로 간신히 처벌은 면한다. 

 

· 평가
말년에 이르러 광종은 왕권강화 과정에 희생된 사람을 기리며, 963년 귀법사를 창건하고 주지로 균여를 임명하는 등 불교에 심취한다. 이때 균여는 악업을 참회하고 상생의 정치를 펼쳐라는 뜻으로 <보현십원가>, <참회업장가>를 짓는다. 광종은 분명히 개혁정책과 왕권 강화로 호족들을 제압하여 훗날 성종대에 태평성대가 오게 하는 초석을 닦은 군주이다. 그러나 훗날 성종대에 최승로는 "광종께서 항상 공손하고 겸손해 처음과 같이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셨다면 어찌 향년 50세에 그쳤겠습니까.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라고 평가했다. 광종이 후대로 갈수록 독선과 피의 숙청으로 폭군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는 마치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같은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태종 역시 비록 숙청에는 잔혹했지만, 훗날 세종의 태평성대에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광종의 가족과 사망

· 가족

광종은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 2남(경종인 왕주, 효화태자), 3녀(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성종비인 문덕왕후)를 낳았으며, 제2비 경화궁부인 임씨(혜종의 딸이며 광종의 조카로 최초의 족내혼)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아들 왕주(경종)은 어린 시절 아버지 광종으로부터 받은 트라우마로 방황하다가, 20살에 즉위해 26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사망

불교계의 승려인 균여, 탄문 등이 사망하자 광종 또한 기력이 쇠잔해진다. 975년 5월, 결국 광종은 재위 26년 3개월 만에 51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헌릉(憲陵)으로 북한 개성시 삼거리 송악산에 소재하고 있으며 제1비 대목왕후 황보씨와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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