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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5대 경종 - 경종의 어린 시절과 등극 및 복수법과 전시과,왕주, 왕승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3.

고려 제5대 국왕 경종(景宗, 955 ~ 981)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이름은 주(伷)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975년 7월부터 981년 8월 사망할 때까지 6년 2개월이다. 경종은 후삼국 통일 이후에 태어나 왕이 된 첫 번째 군주로 20살에 왕이 된다. 그는 어린 시절 삼촌 정종과 아버지 광종의 피의 숙청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지내왔다. 즉위한 후에는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신하들에게 휘둘리다가 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였으며, 음주가무를 좋아하며 지내다 결국 26살에 요절한 청년군주이다. 

경종

 

경종의 어린 시절과 등극

· 어린 시절

광종은 호족들이 태자 왕주(훗날의 경종)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까 항상 의심하고 야단을 친다. 심지어 광종은 하나 남은 친아들 태자마저 외가와 반역을 모의했다고 사약을 내려 죽이려고 하자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의 만류로 간신히 처벌은 면한다. 경종은 이러한 아버지 광종을 두려워하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다.

 

· 경종의 등극

975년 7월, 광종이 병이 들어 51세로 사망하자 아들 왕주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그가 바로 고려 제5대 국왕 경종(景宗)으로 후삼국 통일 이후에 태어나 왕이 된 첫 번째 군주로 이때 그의 나이 20세이다.

 

 

경종의 치세

· 초기 안정적인 정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정책을 펼친다. 아버지 광종에게 억눌려 지냈던 경종은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임명하여 대리청정을 맡긴다. 초기에는 민심을 수습하고 효도를 강조하여 유교적 이념의 왕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경종은 왕선이 건의한 복수법을 시행함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왕선과 호족 세력이 복수법을 악용하여 정적인 광종 대 등용된 신진 세력들이 희생되고, 심지어는 경종의 삼촌인 천안낭군(효성태자)과 진천낭군(진주낭군, 원녕태자)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경종은 집정 왕선을 유배시키고 원로대신 최승로에게 1년간 대리청정을 맡겼으며 그 후 977년부터는 직접 친정을 한다. 경종은 집정을 좌집정과 우집정으로 권력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게 하고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 버린다. 또한 경종은 이전의 토지제도인 역분전을 개혁하여 시정전시과를 실시한다. 그 결과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여 관료들의 급여체제를 확립한다. 또한 광종 때 실시한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뽑아 안정적인 정치를 펼친다. 


· 말기 주색잡기
그러나 경종 말년에는 정쟁과 복수법의 참상으로 정치에 혐오를 느끼고 음주가무와 여색을 즐기고 바둑과 장기 등 오락에 빠진다. 980년 최지몽이 왕승의 모반을 예언하자 이를 믿고 왕승을 처형하기도 한다. 

 

 

경종의 가족

· 가족

경종은 4명의 비(제1비 헌숙왕후 김씨, 제2비 헌의왕후 류씨,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1명의 후궁(대명궁부인 류씨) 즉 5명의 부인 중에 제3비 헌애왕후(천추태후)에게서만 유일하게 아들 왕송(목종)을 낳는다. 이들 부인과 후궁은 모두 사촌으로 경종은 족내혼을 하여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들이다. 또한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자매로 성종의 여동생이다.

 

· 사망

이렇듯 경종은 말기에 정치에 혐오를 느끼고 음주가무와 바둑에 빠져 지내다 결국 병이 들어 병상에 눕게 된다. 병이 든 지 한 달 만인 981년 7월, 당시 만 1세가 갓 지난 어린 아들 왕송에게 왕위를 넘기면 찬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사촌동생인 개령군 왕치(성종)에게 유언을 한 후 왕위를 양위하고 26살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능은 영릉(榮陵)으로 경기도 개풍군에 헌숙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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