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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5대 철종실록 - 철종의 등극과 세도정치의 폐해 및 사망과 가족들, 동학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9.

조선의 제25대 국왕 철종(1831 ~ 1863)의 이름은 이변(李昪)전계대원군 이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 원범이다. <철종실록>는 총 16권(부록 1권)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849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14년 6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864년 4월에 시작하여 1865년 윤 5월에 완성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에는 총재관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 이경재, 김병학 등이 참가했다. <철종실록>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실록이라 말할 수 있다. 뒤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 일본이 설치한 조선 황족에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는 기구인 '이왕직'에 의해 편찬됨으로써 서술의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철종

 

강화도령 원범의 등극

· 출생과 어린 시절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세력들은 정조가 왕이 되면 자기들이 위험해질 것을 염려하여 새로운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정조의 막내 이복동생인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다시 유배를 간다. 은언군에게는 아들이 7명이 있었다. 첫째 아들 상계군 담은 1779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서 자살하고, 은언군 인과 아내 송씨,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천주교 신자로 사사된다. 철종의 아버지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이인(李裀)의 서자인 다섯째 아들 전계대원군 이광(李壙)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로 첩실이다. 전계대원군 이광에게는 세 명이 아들이 있었다. 1844년 헌종 10년에 발생하는 '민진용 역모 사건'으로 의원 출신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하여 전계군 이광과 함께 이광의 큰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일으킨 사건으로 민진용, 이광 등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은 사사되고, 둘째 아들 경응과 셋째 아들 원범만이 살아남아 강화도로 유배된다. 천애고아가 된 이들은 농사꾼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 철종의 등극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 지 5년이 지난 1849년 6월,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령 원범에게 왕위를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는 바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다음날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이 된다. 그가 바로 조선의 제25대 국왕 철종(哲宗)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이다.

 

·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철종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철종이 21세가 되는 1851년까지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한다. 그해 9월 대왕대비의 친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이후 장인인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철종의 친정과 세도정치의 폐해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여 빈민이나 이재민 구휼 등에 노력하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전횡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방도도 찾지 못한 채 진주민란(임술민란) 등의 민란으로 나라는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된다.

 

· 철종의 친정

1853년 봄 관서지방에 대기근이 생기자 철종은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 주고, 재물과 곡식이 떨어지자 물자의 절약과 탐관오리를 징벌한다. 1856년 봄 대화재가 발생하자 피해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한다. 그해 7월 영남 수해지역에 내탕금과 물자를 내어 빈민을 구제하게 한다. 그러나 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해 탐관오리가 설치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 진주민란(1862년)

결국 1862년 철종 13년에 경상도 진주에서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의 수탈과 착취에 대한 농민들의 봉기인 '진주민란' 또는 '삼정의 난'이라고 하는 '임술민란'이 일어난다. 백낙신은 부임 이후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약 4만~5만 냥을 수탈하였고, 진주목의 불법 수탈곡인 도결 8만 4천여 냥을 농민들에게 배당하여 징수하려 했다. 이에 유계춘과 김수만 등의 농민들은 분노하여 2월 18일에 관아와 부호들을 습격하고, 부정 관리들을 처벌하며 재물을 빼앗고, 스스로를 '초군'이라 부르며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시위를 벌였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파견하여 약 3개월에 걸쳐 민란을 수습하였으며, 농민 측과 관리 측 모두에게 처벌을 내렸다. '진주민란'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민 봉기로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의 사회적 불평등과 관리들의 부패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 세도정치의 폐해
이에 철종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대책을 마련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되는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를 색출 처벌하는 등 민란 수습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은 서원을 근거지로 삼아 뇌물을 받아 매관매직을 하고 백성들을 착취한다. 심지어 왕족인 대원군의 형 이하전을 처단하는 등의 무자비한 전횡을 부린다. 이러한 김조순, 김좌근, 김문근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섭정하기까지 60여 년간 계속된다. 이에 철종은 자신의 목숨마지 위협을 느껴 뜻을 펴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철종의 사망과 가족들

· 철종의 사망
철종은 이러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저항을 방법을 찾지 못하자, 자연히 정사를 등한시하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한다. 그 결과 원래 건강하였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186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재위 14년 만에 후사가 없이 사망한다. 그의 능은 예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희릉 오른쪽에 있다. 

· 철종의 가족들

철종은 철인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8명의 부인에게서 5남 1녀의 자식을 얻었으나 자식들이 모두 일찍 사망하고, 숙의 범씨의 소생 영혜옹주만 살아남았으나, 그녀 또한 박영효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사망한다. 철종의 부인과 자식으로는 철인왕후 김씨에게 1남(사망), 귀인 박씨에게 1남(사망), 귀인 조씨에게 2남(사망), 숙의 방씨에게 1남(사망), 숙의 범씨에게 1녀(영혜옹주),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가 있다. 

 

· 철인왕후 김씨(1837 ~ 1878)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1851년 왕비로 간택되어 1858년에 원자를 낳았으나 원자는 곧 사망한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성내지 않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1863년 철종이 사망하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된다. 1866년 휘성, 정원, 수령의 존호를 받고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된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의 능은 예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이다. 

 

 

동학의 탄생

동학은 조선 말기인 1860년 철종 11년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양반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여 신분 평등을 주장하며, 민중의 신앙과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한다. 

 

· 1대 교주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최제우는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가의 서출로 천성산과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도를 하여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하고 1대 교주가 된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민족 고유의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중심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다. 한번 체포되었다가 풀렸던 최제우는 위험을 느낀 나머지 1863년 8월 제자 최시형으로 하여금 제2대 교주로 도통을 전수한다. 이듬해 1864년,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조정은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여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을 한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이었다.

 

· 2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경주 출신인 최시형은 최제우의 제자로 1863년 8월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라는 '사인여천'을 강조하여 동학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가사집인 <용담유사>를 간행하고, '육임제'를 확립하여 동학의 조직을 강화하고, '교조 신원 운동'을 통해 동학의 합법화를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동학은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 민족종교로 발돋움한다. 1898년, 동학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한 최시형은 1897년 12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한 후 1898년 4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7월 서울에서 처형된다. 이때 그의 나이 72세였다. 

 

· 3대 교주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손병희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으며,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선포하고, '교정일치론'을 강조하며 조직을 재정비한다. 그는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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