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에서 전국시대 진나라 소양왕의 책략가 범수(범저)와 원교근공책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위나라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고향 위나라에서는 간첩으로 누명을 쓰고 진나라로 탈출한다. 그는 진나라 소왕을 만나 원교근공의 정책을 펼친다. 그 결과 조나라와의 장평대전을 승리하여 중원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물러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미련없이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 살펴보자.
범저(범수)의 생애
범저(범수, 장록 ? ~ BC 255)는 위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이며, 이름은 '저'이다, 또 다른 이름은 '장록'이다. 진나라의 정치가이며 책사이다. 범저는 '수고'를 수행하여 제나라로 간다. 제나라 양왕이 범저의 인품에 반해 그에게 많은 상을 준다. 그러나 범저는 그것을 거절한다. 이에 제 양왕은 범저를 의심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수고는 위나라로 돌아와 재상 '위제'에게 범저는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팔아넘기는 간첩이라고 고발한다. 그래서 범수는 멍석말이를 당해 몰매를 맞고 정안평이 도움으로 탈출하여 이름을 '장록'으로 개명한다. 진나라 소양왕(진 소왕)의 사신 왕계의 추천으로 장록(범저)은 진나라로 들어간다.
진나라로 간 범저(범수)
· 양후(진소왕의 외삼촌)와의 조우
양후는 진소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남동생으로 진소왕에게 외삼촌이 된다. 진소왕은 1년 동안 범저를 푸대접한다. 그리고 양후는 장군 백기를 등용한다. 당시 양후(위염)의 권세는 진소왕보다 더 높았다.
· 원교근공책
진소왕 36년 남쪽 초나라의 '인'과 '영'을 빼앗고 초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고 나중에 사망하게 된다. 그 후 백기가 진의 장군으로 제나라를 공격한다. 장평대전도 범수에 의해 백기 장군이 치르게 된다. 한편 범수가 푸대접 받으며 1년이 지난 어느날 진소왕은 범수를 부른다. 이에 신하가 "대왕께서 행차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범수는 일부러 후궁저로 들어가 "진나라에는 왕은 없고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요."라고 말한다. 이에 진소왕은 범수를 받아들이고 신임하게 된다. 범저는 원교근공책(가까운 한나라, 위나라를 치고 멀리 있는 제나라와는 친교를 맺는 정책)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진다."라고 말하며 양후(위염)를 몰아낸다. 선태후를 폐하고 왕후의 재산을 몰수하니 수레 1천 대의 보물이 나왔다. 그러자 진소왕은 범저에게 '응읍'을 식읍으로 주어 '응후'라고 부른다.
· 한 톨의 은혜, 한 푼의 원한도 갚는다.
위나라는 '수고'를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낸다. 이때 범저는 허름한 복장을 한 체 수고를 찾아간다. 수고는 범저를 무시하고 허름한 솜옷을 주며 장록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재상 장록을 만나게 된다. 재상 장록이 범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고는 무릎을 꿇고 기면서 범저에게 비굴하게 절을 한다. 이에 범저는 수고에게 죄인들 사이에 두고 말구유에서 밥을 먹게 한다. 그러나 목숨만은 살려준다. 이때 이 소식을 들은 재상 위제는 평원군이 살고 있는 조나라로 도망친다. 그 후 자기를 추천해 준 왕계가 그에게 보답을 요구한다. 이에 범수는 과거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왕계를 하동태수로 임명한다. 또 그는 백기장군의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해 백기가 그 자리에 정안평을 장군으로 추천하다. 나중에는 중상모략으로 그를 죽게 만든다.
· 진소왕이 평원군을 부르다
진나라 소왕은 평원군에게 "주나라 문왕은 여상을 얻어 태공이 되고,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얻어 중부로 삼았고, 나는 범수를 얻었다. 그러나 범수의 원수(위제)가 당신(평원군)의 집에 있으니 사람을 보내 그의 머리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평원군을 포로로 잡는다. 또 조나라 왕에게 위제를 죽이라고 편지를 보낸다. 그러자 위제는 다시 위나라 신릉군에게로 도망간다. 결국 그는 자살을 한다.
· 장평 대전
한편 한나라 왕은 '상당' 땅을 진나라에 주고 화친을 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상당태수가 조나라에 먼저 항복하게 된다. 조나라 평원군은 상당태수가 준 상당 땅을 받는다. 이에 화가 난 진나라와 조나라 간의 2년에 걸친 장평대전(BC 262 ~ BC 260)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조나라는 장군 염파, 곽개, 그리고 장군 조괄이 있었고, 진나라는 장군 왕홀, 범저, 장군 백기가 있었다. 먼저 진나라에서는 왕홀장군과 조나라에서는 염파 장군이 결전을 치르게 된다. 조나라의 염파 장군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수비위주로 작전을 짜 성을 지키고 나오지를 않는다. 그 결과 진나라는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 범저는 조나라 간신 곽개에게 뇌물을 주고 이간책을 쓴다. "염파는 겁이 많아 수비만 한다. 조사 장군의 아들 조괄이 지휘를 맡으면 단숨에 진나라를 물리칠 것이다. 그러니 염파를 끌어내리고 조괄을 장수를 추천하라."라고 헛소문을 퍼뜨린다. 그 결과 이간책이 성공하여 염파가 물러나고 조괄이 총지휘를 맡게 된다. 그러고 진나라는 몰래 가장 유능한 백기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지휘를 맡게 한다. 그 결과 진나라의 백기장군은 조나라 조괄의 40만 대군을 몰살시킨다.
· 조나라 한단성 공격
장평대전이 끝난 후 진나라는 조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조나라 수도 한단을 침공한다. 이때 범저는 권력 다툼에 빠져 장군 백기를 물러나게 하고 그 자리에 정안평을 추천한다. 결국 정안평을 대장군으로 하여 한단성을 공격한다. 조나라 왕은 평원군을 시켜 위나라와 초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한다. 위나라는 평원군의 처남인 신릉군 위무기가 10만의 지원군으로 출병하고, 초나라는 춘신군이 10만의 병사를 데리고 도우려 오게 된다. 이들 삼공자들의 조·위·초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진나라는 궁지에 몰려 불리하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정안평 장군은 부하 2만과 함께 조나라에 투항을 하게 된다.
범저(범수)의 은퇴
이 일로 범저는 진소왕에게 머리를 풀고 석고대죄를 한다. 진소왕은 그를 용서한다. 그 후 과거에 범저가 추천한 하동태수 왕계가 다른 나라의 제후와 내통하다 사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도 역시 진소왕은 범저를 용서한다. 어느 날 연나라 사람 '채택'이 찾아와 범저에게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라고 충고를 한다. 범저는 크게 느끼고 채택을 추천하고 자기는 자리에서 물러나 은퇴를 한다.
※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는 글입니다. 6개국 통합 재상 소진의 합종책, 추자고, 두현량, 연나라 이왕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전국시대 진나라 소왕의 책략가 범수(범저)와 원교근공책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범수는 진나라 소왕을 만나 원교근공의 정책을 펼친다. 그 결과 조나라와의 장평대전을 승리하여 중원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것을 후세 사학가들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범수는 백기장군을 중상모략하고 시기해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마침내 죽게 만드는 일과 같은 잘못도 저지런다. 그런 범수가 한 처신 중에 가장 잘한 일은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때를 알고 미련 없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이 이를 행하지 않아 마지막에 고통을 당한다. 예를 들면 이사는 물러나지 않아 간신 조공에 의해 죽게 되고, 상앙은 물러나지 않아 진효공이 죽자 아들 진혜왕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이와 같이 물러날 때 미련을 가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큰 재앙을 당하게 된다. 옛말에 "공수신퇴 천지도(功遂身退 天之道)", 공을 세운 다음에는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다. <도덕경 7장>라는 말이 있다. 이 처럼 범저는 자기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요즘 현대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범저의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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