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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마천 사기

재상 인상여와 장군 염파의 문경지교, 장평대전, 민지지회, 완벽귀조

by 이야기마을촌장 2023. 12. 1.

조나라의 인상여와 염파는 서로 나라를 위하여 각자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한다. 인상여는 재상으로서 외교나 정책에서, 염파는 장군으로서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우정은 '문경지교'라는 고사성어로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의 업적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전국시대 조나라 재상 인상여와 장군 염파의 문경지교, 장평대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인상여염파

인상여와 염파의 생애

인상여는 전국시대 조나라사람으로 나중에 조나라의 재상이 된다. 고사성어 ' 완벽(完璧)', ' 문경지교(刎頸之交)'는 그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염파장군은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으로 나중에 신평군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염파는 조나라에서 뛰어난 장군으로 제나라, 위나라, 진나라와의 전쟁을 치룬다. 그 후 진나라와 장평대전에서는 조나라 효성왕이 염파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괄을 상장군으로 임명하기도 한다. 또 연나라의 침공을 염파와 악승이 크게 격파한다. 염파장군은 간신 곽개의 모함으로 사령관 자리를 악승에게 빼앗기게 되자 악승을 치고 난 후 조나라로 망명한다. 전국시대 4명의 이름난 명장이 있는데 그들을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한다. 즉, 진나라의 장군 백와 왕이고 그리고 조나라의 장군 염와, 이이다. 이들 4명의 장군이 가장 최고로 용병술이 뛰어나고 정밀하다는 뜻으로 천자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상여와 염파의 고사성어

· 완벽귀조(完璧歸趙)

초나라 사람 변화가 발견한 보물로 조혜문왕이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알게 된 진소왕이 진나라 성 15개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다. 이에 바꾸는 편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신하 인상여가 조혜문왕에게 말하고 그는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사신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진소왕이 15개 성을 주려고 하는 의향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는 진소왕에게 화씨벽이 결점을 알려주겠다고 다시 돌려받는다. 그리고 받자마자 "대왕께서는 성을 줄 의향이 없어 보이며 나를 신하로 대접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하며 구슬을 깨뜨리고 죽겠다고 말한다. 이에 벽옥이 깨질 것이 두려워한 진소왕은 그를 극빈으로 대접을 한다. 그사이 인상여는 몰래 부하를 시켜 구슬을 다시 조나라로 보낸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진나라 소양왕에게 "구슬은 조나라로 몰래 보냈으며,  성을 넘겨주신다면 다시 구슬을 가져오겠습니다. 대왕을 속였으니 가마솥에 삶아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진소왕은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용서하고 잘 대접하여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이 이야기에서 "완벽귀조(完璧歸趙)" 즉 "인상여가 구슬을 완전하게 조나라로 돌려보냈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가 유래되었다. 다른 말로 "완벽(完璧)",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한다.

 

· 민지지회 (澠池之會)

BC 279년 진나라 소양왕은 조나라 혜문왕에게 '민지'라는 곳에서 두나라의 우호를 위해 연회를 열자고 연락한다. 그러자 진나라의 속셈을 알고 위협을 느낀 조 혜문왕은 신하들과 상의를 한다. 이때 인상여가 나서 "참석하지 않으면 조나라를 업신여길 것이니 참석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에 왕은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연회 중에 진소왕이 조혜문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이를 사관에게 기록하라고 한다. 이때 인상여가 나서 진소왕에게 칼로 위협하며 분부(장구의 일종)를 치게 한다. 그러고 나서 사관에게 기록하라고 한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조나라의 성 15개를 바쳐 진소왕의 장수를 축복하라고 하자,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바쳐 조 혜문왕의 장수를 축복하라고 말한다. 결국 진나라는 조나라를 제압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물러간다.

 

· 문경지우(刎頸之友)

민지지회 이후 인상여는 상경으로 임명된다. 그러자 염파장군은 자기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거는데 비해 말로만 하는 인상여가 더 높은 공을 받는다는 것에 반발한다. 그리고 인상여는 계속하여 염파장군을 피한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인상여를 비난한다. 이에 인상여는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기만 하면 진나라가 침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염파장군은 회초리를 가지고 와 인상여에게 "이 비천한 몸이 공이 그렇게 너그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나를 회초리로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 후 둘은 서로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정도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로 "문경지교(刎頸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되었다.

 

 

인상여와 염파의 장평대전 

한편 한나라 왕은 상당땅을 진나라에 주고 화친을 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상당태수가 조나라에 먼저 항복하게 된다. 조나라 평원군은 상당태수가 준 상당땅을 받는다. 이에 화가 난 진나라와 조나라 간의 2년에 걸친 장평대전(BC 262 ~ BC 260)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조나라는 장군 염파, 곽개, 그리고 장군 조괄이 있었고, 진나라는 장군 왕홀, 범저, 장군 백기가 있었다. 먼저 진나라에서는 왕홀장군과 조나라에서는 염파 장군이 결전을 치르게 된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 장군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수비위주로 작전을 짜 성을 지키고 나오지를 않는다. 그 결과 진나라는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 범저는 조나라 간신 곽개에게 뇌물을 주고 이간책을 쓴다. "염파는 겁이 많아 수비만 한다.  조사 장군의 아들 조괄이 지휘를 맡으면 단숨에 진나라를 물리칠 것이다. 그러니 염파를 끌어내리고 조괄을 장수를 추천하라."라고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때 인상여는 몸이 아파 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효성왕에게 "조괄은 책만 읽었지 임기응변이 없습니다. 그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장군으로 쓰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효성왕은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 결과 이간책이 성공하여 염파가 물러나고 의욕만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조괄이 총지휘를 맡게 된다. 그러고 진나라는 몰래 가장 유능한 백기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지휘를 맡게 한다. 그 결과 조나라의 조괄장군은 거짓으로 후퇴하는 진나라의 계략에 빠져 전세가 불리하게 된다. 그러던 중 조괄이 전투 중에 사망하자 조나라 40만 군은 진나라의 백기장군에게 투항한다. 그러나 백기장군은 투항한 조나라 40만 대군을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린다. 그 후 조나라는 점점 패망의 길로 간다. 그 후 30년이 지나 진시황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

※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는 글입니다. 진소왕의 책략가 범수(범저)와 원교근공책, 장평대전, 한단성, 양후

 

진소왕의 책략가 범수(범저)와 원교근공책, 장평대전, 한단성, 양후

우리는 여기에서 전국시대 진나라 소양왕의 책략가 범수(범저)와 원교근공책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위나라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고향 위나라에서는 간첩으로 누명을 쓰고 진

bong3614.tistory.com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재상 인상여와 장군 염파의 문경지교, 장평대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진나라 소양왕에 굴복하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인상여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평대전에서 인상여는 병이 들었어도 끝까지 조나라 효성왕에게 충언을 말하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안타까울 뿐이다. 또 백전노장 염파장군이 활약하여 진나라를 잘 방어하고 있었으나 간신들에 의해 결국 조괄장군으로 교체되고 마는 것도 정말 유감스럽다. 이와 같이 나라가 망할 때에는 충신(인상여, 염파)은 사라지고 간신(곽개)이 득세한다. 그리고 왕은 충언을 듣지 못하고 판단이 흐려진다. 결국 조나라는 장평대전 이후 점점 국력을 잃고 30년 후 진시황에 의해 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나라의 위기상황에서는 인재를 기용하는 데 있어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강대국들의 사이에 끼여 나라의 존폐가 달린 위급한 상황인데 정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때 정말로 필요한 인재가 나와야 하며, 또 국민들은 그 인재를 잘 파악하고 뽑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요즘 친구 간의 우정을 살펴보면 서로 믿고 평생 사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염파장군, 문경지교)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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