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는 주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된 나라이다. 위 문후는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 왕으로 개혁정치를 펼쳤으며 서하지방을 개척하는 등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다. 법가의 시조인 이극(이회)을 등용하였으며,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삼았다. 즉 그는 유가적 법가주의를 채택 실시하였다. 그리고 오기장군을 등용하여 진나라의 동진을 막아내고 서하지방을 차지한다. 남으로 초나라의 중원장악을 저지하여 전국시대 최초의 강대국인 패자로 등장한다. 위나라는 그 후 위 무후를 거쳐 위 혜왕(양혜왕)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위 문후의 유가적 법가주의와 자하, 악양, 서문표, 이극(이회), 오기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위문후의 생애
위 문후(BC445 ~ BC 396)는 중국전국시대 위나라의 시조로 성은 '위', 이름은 '사'이다. 위문후의 아버지 위 환자는 당시 진나라를 위씨, 조씨, 한씨가 분할 통치를 하였지만 명목상으로는 아직 주나라의 신하로 있었다. 위 문후는 진 문공이 유랑을 할 때 같이 하여 대부가 되었으며, 주나라 위열왕으로부터 조, 한나라와 같이 정식으로 인정받아 주나라로 책봉되었다. 그는 법가의 시조인 이회, 오기, 악양, 서문표 등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친다.
위문후의 개혁정치
위 문후는 인재를 능력위주로 등용하였다. 특히 법가의 시조인 이회를 재상으로 중용하여 그의 사상인 "상과 벌을 정확하게 준다."라는 법가사상을 근본이념으로 하여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동시에 그는 공자의 제자 자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자의 어진정치를 배워 군자로서의 도리, 신하로서의 도리, 백성으로서의 도리 등 유가사상을 체제안정화에 적용하였다. 즉 유가적 법가주의를 채택하여 왕권강화(법가사상)와 체제 안정화(유가사상)를 동시에 취하였다. 보통 공자사상은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이후에 체제안정화를 위해서 도입된다. 그리고 위 문후는 원활한 지방통치를 위해 군현제를 실시한다.
· 유가적 법가주의 채택
위 문후는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면 현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 결과 자하의 제자인 전자방, 단간목 등의 많은 현자들이 모이게 된다. 따라서 공자사상의 서하학파(자하를 스승으로 하는 공자의 2대 제자들이 모인 학파로 전자방, 단간목, 고기, 금활리 등이 있다.)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 문후는 자하를 통해 공자의 어진 정치(도덕 정치)를 배워 군자의 도를 펼치게 된다. 이로 인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를 '학문을 좋아하는 군자'라고 말하며 크게 칭찬한다.
· 변법개혁
위문후는 법가사상가인 이회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변법을 실시한다. 이회는 전자방, 단간목 등의 학자를 통해 6편(도법, 적법, 수법, 포법, 잡법, 구법)의 법률을 제정하여 공포 시행하였다.
· 군현제 도입
위 문후는 중앙의 왕의 명령이 지방까지 잘 전달되도록 하는 군현제를 도입하여 실시하였다. 먼저 오기장군에게 진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그 결과 하서지역 5개 성을 정복하고 그를 '서하' 군태수로 임명한다. 그리고 서문표를 '업' 현태수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원활하게 군과 현을 통치하였다.
· 능력위주의 인사(이회, 오기, 악양, 서문표)
위 문후는 법가사상의 시조인 이회(이극)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따라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벼슬과 녹봉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상과 벌을 정확하게 주는 법가적 사상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또 평적법과 봉록제를 실시하고 최초의 법전인 <법경>을 편찬한다. 그리고 위나라, 노나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오기의 능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중용하여 진(秦)나라의 5개 성을 함락시키고 오기를 서하태수로 임명한다. 자신의 식객인 악양을 장군으로 등용하여 중산국을 정벌하였다.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에 3개월이나 공격을 지연하였다. 이에 그를 모함하는 많은 상소가 올라왔음에 불구하고, 위 문후는 끝까지 그를 믿고 지켜주었다. 심지어는 악양의 아들 악서가 중산국에 살고 있었는데 중산국왕이 악서를 잡아 삶아 국을 끓여 보내도 악양은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중산국 정벌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위 문후는 수리 전문가인 서문표를 중용한다. 그는 수로를 정비하여 논으로 물을 보내는 관개사업을 펼쳐 농업생산량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또 그는 황하지역의 미신을 타파하였다. 황하에서는 예로부터 강의 신(하백)을 달래려고 처녀를 하백에게 시집보내는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이를 본 그는 "처녀가 못생겼으니 다음에 보낸다고, 네가 직접 하백에게 가서 말하여라."라고 하면서 무당과 그의 제자를 강에 던져 버린다. 그 이후부터는 처녀를 공양하는 미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맺음말
여기에서는위 문후의 유가적 법가주의와 자하, 악양, 서문표, 이극(이회), 오기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위 문후는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 왕으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펼쳤으며, 서하지방을 개척하는 등 위나라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결과 전국시대 최초의 강대국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근본 통치이념으로 법가사상에서 유가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유가적 법가사상을 채택하여 실시하였다는 점을 높이 칭찬하고 싶다. 전국시대 초기 주나라는 권위가 무너지고 힘이 없고 타 제후국의 눈치만 보고 지내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강력한 힘(군사력)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힘으로 제어하지 않고 주나라 위열왕의 정식 나라인정 책봉을 기다리는 것도 대단한 것이라 생각된다. 위 문후는 도리를 지킬줄 알고, 어질고 학문을 좋아했던 것 같다. 또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강력한 법 집행 이외에 체제 안정화를 위한 다른 통치이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주를 인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어진 정치(도덕 정치) 즉 유가사상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사상을 배워 나라를 안정시켜 나간다. 그 결과 전국시대 최초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사마천도 <사기>에서 " '학문을 좋아하는 군자' 위 문후 "라고 말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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