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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마천 사기

전쟁광 위 혜왕과 앉은뱅이 책사 손빈, 삼인성호, 계릉전투, 마릉전투

by 이야기마을촌장 2023. 11. 19.

위혜왕은 그야말로 좌충우돌 전쟁광으로서 의심이 많은 군주이다. 이러한 그의  성격으로 인하여 유능한 인재들은 위나라를 떠난다. 특히 후기 법가사상의 대가인 공손 앙(상앙)같은 인물은 위혜왕이 등용하지 않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 효공에게 간다. 그는 재상이 되어 변법개혁을 실시하여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 위혜왕의 성품은 의심이 많고 일관성이 없으며, 욕심이 많다. 이러한 위혜왕의 성격은 <맹자> '양혜왕 편'에 잘 나타나 있다. 양혜왕은 "나는 열심히 했으나 전략부재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좋은 전략을 만들 수 있는 인재들을 기용하지 않은 위나라는 발전하지 못하고 서서히 약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는 할아버지 위문후가 추진하였던 정책처럼 일관성 있게 서진정책을 추진하여야 했었다. 그러나 양혜왕은 성격상 그러지 못하였다. 여기에서는 좌충우돌 전쟁광 위 혜왕과 앉은뱅이 책사 손빈에 대하여 사마천의<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양혜왕

생애 및 즉위

위 혜왕(양혜왕, 위혜후 BC 400 ~ BC 334)은 이름은 '앵'으로 전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왕이다. 할아버지인 위 문후, 아버지인 위 무후는 제후로 불려지며 정식 왕으로 불리는 것은 위혜왕부터이다. 또 위 혜왕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진다. 진나라에게 땅을 빼앗긴 후 수도를 '대량'으로 옮겨고 난 이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양혜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맹자는 그를 양혜왕이라 한다. 위혜왕은 동생 공중완과의 왕위계승싸움을 벌인다. 이때  조나라와 한나라가 개입(탁택전투) 하였으나 물러가고 안읍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위혜왕 성품

· 三人成虎 (삼인성호)

신하 방총이 태자와 같이 조나라에 인질이 되어 떠나가게 되었을 때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방총은 다시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믿겠냐고 묻는다. 여전히 “왕은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왕은 “그때에는 믿을 것 같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방총은 "저잣거리에는 호랑이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없는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 '夫市之無虎明矣 然而三人言而成虎'(부시지무호명의 연이삼인언이성호)."라고 말한다. 이렇게 위혜후에게 자신을 비방하는 자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비방하는 말을 듣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떠난다. 그러나 조나라에 당도하기도 전에 벌써 방총을 비방하는 모함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결국 왕은 방총을 의심하게 된다. 몇 년 후 태자는 위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방총은 왕의 의심을 받아 돌아오지 못한다. <한비자 내저설>, <전국책 '위책 혜왕'> 여기에서  "근거 없는 말이라도  여러 번 듣게 되면 믿게 된다."는 뜻으로 "삼인성호(三人成虎)"가 유래되었다. 이렇듯 위혜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인재 유출

· 공손 앙(상앙)

위혜왕이 즉위한 초기에 위나라는 주변 나라(조, 제, 진, 송, 한)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따라서 국력이 강해질 안정된 시기가 없고 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에 재상 공숙 좌는 죽기 전에 위혜왕에게 " 공손 앙(상앙)을 재상으로 등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만약 등용하지 않으려면 당장 이 자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유언으로 남긴다. 그러나 위혜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공손 앙을 등용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았다. 이에 실망한 공손 앙은 진나라 효공을 찾아 가 재상이 된다. 그 후 그는 변법 개혁을 추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강대국으로 만든다. 세월이 흘러 공손 좌의 예언대로 진나라는 위나라를 침공하여 영토를 빼앗아 간다. 서서히 위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법가사상가 상앙(공손앙)의 변법개혁과 죽음, 이목지신, 오기장군

 

법가사상가 상앙(공손앙)의 변법개혁과 죽음, 이목지신, 오기장군

위혜왕이 즉위한 초기에 위나라는 주변 나라(조, 제, 진, 송, 한)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따라서 국력이 강해질 안정된 시기가 없고 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해결책으로 재상 공손 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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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빈

위혜왕은 상앙과 같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사람을 모은다. 이때 귀곡자의 제자인 방연이 찾아온다. 위혜왕은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한다. 시간이 지나 위혜왕은 같은 귀곡자 문하인 손빈이 유능한 인재이라는 소문을 듣는다. 방연과 의형제인 손빈을 데리고 오라고 방연을 보낸다. 그러나 방연은 손빈이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빈이 오면 자기가 밀려날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방연은 위혜왕에게 "손빈은 제나라와 몰래 내통하고 있다."라고 모함을 한다. 화가 난 위혜왕은 손빈을 잡아 월형(다리를 자름), 묵형(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새김)에 처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나라 사신 손우곤이 그를 제나라 위왕에게 데리고 간다. 위왕은 그를 중용한다.

 

 

위·제 전투

귀곡자의 제자이며 의형제이었던 방연과 손빈은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그들은 각자 위나라(방연), 제나라(손빈) 위해 2차에 걸쳐 싸운다. 최근에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가 배경이 된 중국 영화 "The Warring States (전국:천하영웅의 시대)"가 만들어져 상영되고 있다.

 

· 계릉 전투(1차)

위 혜왕은 방연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침공한다. 조나라왕은 제나라 위왕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제나라 위왕은 '전기'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보낸다. 이때 손빈은 위나라 군사가 조나라 도성 한단을 공격하고 있는 사이에 비어 있는 위나라 도성 '대량'을 공격하는 계책을 세운다. 위나라 군대는 자국이 침공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되돌려 '대량'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긴 원정에 지친 위나라 방연의 군사들은 계릉에서 대패를 한다. 제나라는 계릉전투에서 대승을 하여 조나라 한단을 구한다.(BC 354)

 

· 마릉 전투(2차)

이번에는 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한다. 한나라는 제나라 선왕(위왕의 아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제나라 선왕은 '전기'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한나라를 구원하러 보낸다. 역시 손빈은 한나라로 진격하지 않고 위나라 도성을 공격한다. 이번에도 방연은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나라 군사들은 이미 국경을 넘어 위나라 태자 신의 대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태자 신의 군사들이 결사적으로 방어를 하자 제나라 군사 손빈은 회군을 결정한다. 이것을 본 방연이 추격을 하기 시작한다. 길이 좁고 장애물이 많은 마릉에 도착했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길 한복판에 나무하나가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그 나무에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방연은 깜짝 놀라 후퇴를 명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손빈은 일부러 후퇴를 하여 궁수를 매복시켰던 것이다. 결국 방연은 분에 못 이겨 목을 베고 자살을 한다. 제나라 군사들은 대승을 거두고 태자 신을 포로로 잡는다.(BC 341)

 

 

위·진 전투

마릉 전투 이후 위나라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나라 공손 앙(상앙)은 위나라를 서쪽지방을 공격한다(BC 340). 그는 위나라 대장 공자 앙을 속여 포로로 잡고 대승을 거둔다. 결국 위나라는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위나라는 양나라라고 불리어진다. 전쟁에 졌다는 소식을 들은 위혜왕은 "과거에 공숙 좌의 말을 듣고 상앙을 죽였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라고 후회를 한다. 결국 위나라는 한나라와 같이 제나라에 복속된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좌충우돌 전쟁광 위 혜왕과 앉은뱅이 책사 손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위혜왕은 스스로 "나는 열심히 했으나 전략이 없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전략을 실행할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쳤기 때문이다. 특히 상앙이나 손빈 같은 책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욕심 많고 의리가 없는 방연 같은 인물을 중용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리고 위혜왕은 할아버지 위문후가 추진하였던 서진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여야 했었다. 또 고사성어 '삼인성호'에서 보이는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군주가 유능한 인재를 볼 수 없고, 일관성도 없고 그리고 의심도 많다면 그 나라는 잘 될 수가 없다. 그 결과 진나라에게 서쪽 지방을 빼앗기게 되어 점점 패망의 길로 들어갔다. 현대인들도 위혜왕의 사례를 본보기 삼아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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