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는 위나라 출신으로 초기 법가 사상가(이회, 오기)이다. 그는 묵숨을 위해 도망 다니며 여러 나라(위나라, 노나라, 초나라)에서 생활을 한다. 그는 찾아 간 나라의 법을 개혁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과정에 가는 곳마다 자기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사람을 만들게 된다. 그 결과 초나라에서 그들로부터 활을 맞고 죽게 된다. 또한 오기는 장군으로서도 탁월하였다. 특히 위나라에서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서하지역 5개 성을 점령하여 위문후로부터 서하태수로 임명된다. 72번을 싸워서 64번을 승리하고 한번도 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장군이 된다. 그런데 오기에 대한 후세 사학가들의 평가는 각각 다르다. <사기>, <한비자>, <전국책>, <여씨춘추> 등 여러 문헌의 기록을 살펴보면, 오기를 법과 원칙만 따지는 냉혈한으로 묘사하는 문헌이 있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그를 인정이 많고 부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록한 책도 있다. 여기에서는 72전 무패의 명장 오기의 업적과 평가를 그가 살았던 시기별로 알아보고자 한다.
초기 생애
오기( ? ~ BC 381)는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출신이다. 그는 병법가이며 정치가인 동시에 최고의 장군이다. 그를 '오자'라고도 한다. 그는 어릴 때 자기보다 더 키가 크고 힘이 센 깡패와 싸우다가 맞은 적이 있다. 오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또 그다음 날 계속 찾아가서 그 깡패와 싸운다. 결국에는 깡패가 지쳐 오기에게 항복한다. 이렇듯 오기는 지기 싫어하는 근성이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오기가 고향을 떠나게 된 상황에 대하여는 <사기>와 <한비자>의 기록이 각각 다르다.
· <사기>
오기은 원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돈으로 관직을 사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비웃는 마을 사람 30여명을 죽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에게 "나는 출세하여 관리(경상)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나 증자의 제자가 된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출세하여 관리가 되지 못한 그는 어머니 장례에 가지 않고 공부를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오자는 증자의 문하에서 쫓겨나게 되어 고향을 떠났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비자>에서는 다르게 기록한다.
· <한비자>
오기는 아내에게 띠를 짜도록 하였는데 아내가 치수보다 좁게 짰다. 이에 오기가 고치라고 말하자, 아내는 "이미 그 정도 날실을 넣었기에 고칠 수가 없다."라고 한다. 화가 난 오기는 이혼을 하고 아내를 처갓집으로 보낸다. 아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아내의 오빠가 "오기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먼저 아내에게 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말어라"라고 말하며 말린다. 또 오기 아내의 남동생이 군주의 신임을 받는 신하인데 그가 오기에게 "다시 아내를 받아 달라"라고 말하니 오기는 화가 나 위나라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오기는 성질이 급하고 원리 원칙을 중시하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 것 같다.
노나라 시기
오기는 노나라에서 병법을 공부한다. 오기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도망가게 되는 상황도 <사기>와 <한비자>는 서로 다르게 기록한다.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나라에서 노나라를 침공한다. 이때 노나라 왕은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어서 그를 의심을 하고 장군으로 기용하는 것을 망설인다. 그러자 오기는 아내의 목을 베어 죽여 버린다. 그 후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크게 물리 친다. 그러나 주위 신하들은 오기를 시기하여 과거 고향 위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들추며 모함한다. 이에 노나라 왕은 오기를 쫓아낸다. 그러나 <한비자>에서는 오기는 '노나라의 계손씨가 노나라 군주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라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 계손씨에게 살해당하였다는 노나라 군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위나라 시기
오기의 위나라에서의 생활은 위 문후와 위 무후의 시기로 나누어 진다. 오기는 위문후를 만나 장군으로 기용되어 진나라 5 개성을 함락시켜 서하태수로 임명된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전승의 기록에 못지않은 72번을 싸워서 64번을 승리하고 한번도 지지 않는 정말로 전무후무한 장군이 된다. 마침내 오기는 위문후를 서하지방의 패자가 되게 한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를 모함한다. 결국 재상이 전문에서 공숙으로 바뀔 때 오기는 승진에서 소외되고 누락된다. 위문후가 죽고 위무후가 즉위하자 오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초나라로 도망간다.
· 위문후
노나라를 떠나온 오기는 위나라 위문후를 만나게 된다. 위문후는 오기의 사람됨에 대해 이극(이회)에게 묻는다. 이에 이극은 "그는 비록 탐욕이 있고 여색을 밝히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위문후는 그를 장군으로 중용한다. 오기장군은 평소 부하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하는 등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어느 날 오기가 병졸의 종기를 보자 그것을 입으로 빨아준다. 이 소식을 들은 병졸의 어머니가 통곡을 한다. "아니 장군이 종기를 빨아주는데 왜 우는 것이오?"라고 주위 사람이 묻는다. 그러자 병졸의 어머니는 "지난날 아버지 종기를 빨아주었더니 전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다. 이번에는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아들도 어디서 죽게 될 것 같아 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이야기에서 "연저지인(吮疽之仁)", 즉 '종기를 빨아줄 정도의 어진 행동'이라는 뜻의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오기의 부하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다. 그 결과 오기는 진나라를 공격하여 서하지역 5개의 성을 함락시킨다. 위문후는 그를 서하태수로 임명한다. 오기장군은 72전 64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는 5만 명 군사의 무졸(특수부대)을 창설하여 유지한다. 오기장군은 위문후의 서진정책의 선봉장으로 활약을 하여 위문후가 서하의 패자가 되게 한다.
· 위무후
위문후가 죽고 위무후가 즉위한다.(BC 386), 재상 전문이 죽고 공숙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오기의 공을 시기하여 위무후에게 "오기가 진나라로 갈지도 모르니 공주와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오기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공숙은 일부러 공주를 함부로 대하여 공주가 자기를 막 대하는 광경을 오기가 보게 한다. 오기는 공주가 원래 성품이 나쁜 것으로 오해를 한다. 그 후 위무후는 오기를 불려 공주와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오기는 결혼을 거절한다. 위무후는 오기가 진나라로 갈지도 모른다고 오해를 하며 그를 신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책>의 기록을 보면 공숙은 오기를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공을 오기에게 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씨춘추>에서는 오기는 서하의 땅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위문후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자기와 함께 천하를 통일하였을 것이다. 미래에는 서하의 땅이 진나라의 것이 될 것이며 위나라는 작아질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오기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과연 시간이 지나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위나라는 점점 국력이 약해져 망하게 된다.
· 오자병법
오기가 위문후, 위무후와 이야기한 병법서로 본래 48편이었으나 지금은 6편(도국, 요적, 치병, 논장, 응변, 여사)만 전해진다. 손자병법과 더불어 대표적인 병법서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요즈음 군사를 논하는 자들은 손자의 13편과 오기의 병법을 따른다"라고 오기의 <오자병법>을 높이 평가한다.
초나라 시기
위무후를 피해 초나라로 도망온 오기는 초나라 도왕을 만난다. 초도왕은 그를 바로 재상으로 임명한다. 오기는 법령을 바꾸고 기득권층(먼 왕족, 공족, 귀족)의 특권을 몰수하고, 군대를 양성하며, 성을 쌓고 불모지를 농경지로 개척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그결과 나라가 부강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진(陳), 채나라를 병합하고, 서로는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강력한 나라가 된다. 그러나 그 시행과정에 기득권층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초 도왕이 사망하자(BC 381) 기존의 기득권층인 귀족과 공족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오기는 쫓겨 도망가다가 화살을 맞는다. 그는 초 도왕의 시체 위에 쓰러져 죽는다. 이때 도왕의 시체를 향해 화살을 쏜 사람들은 후에 초 숙왕(도왕의 아들)에 의해 모두 죽게 된다.
※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습니다. 위 문후의 유가적 법가주의와 자하, 악양, 서문표, 이극(이회), 오기
맺음말
우리는 위에서 72전 무패의 명장 오기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오기는 초기에 많은 악행(마을 친구 30명을 죽이는 이야기, 어머니 장례를 가지 않은 일, 아내의 목을 치는 이야기 등)을 저질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오기에 관한 선행도 많이 있다. <여씨춘추>, <한비자>에서는 오히려 오기를 권세와 재물에 초연한 현자로 표현한다. 또 고사성어 '연저지인'을 보면 오기의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많은 문헌에서조차 오기를 서로 다르게 평가한다. 사마천의 <사기>, <한비자>에서는 오기를 법과 원칙밖에 모르는 차가운 냉혈한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 학계에서는 "봉건귀족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과장되었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도 오기에 대하여서 다시 한번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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