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삼대 약녀는 한나라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여치),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 3대에 걸쳐 독재적 권력을 휘둘렸던 청나라 서태후를 말한다. 그녀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권력을 장악한 후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정치를 펼쳐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중국 3대 악녀(한 여태후, 당 측천무후, 청 서태후)의 그들의 권력장악 과정과 후세의 평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여태후(여치)
· 한고조 사망 전 여치
폐후 여씨(여태후, 여치 BC 241 ~ BC 180)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이며 혜제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여공이 유방의 관상을 보고 여치를 유방에게 주어 결혼을 하게 된다. 유방의 천하를 정벌하러 전쟁터로 돌아다닐 때 집안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일을 하면서 유방을 내조를 한다. 심지어 그녀는 여장부의 기질이 있어 여태후가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스스로 항우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얻어 한나라를 건국하게 되자 그녀는 중국 최초로 정식 황후가 된다. 그러나 한고조 유방은 여태후의 아들인 유영(혜제)을 폐위시키고,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등 그녀는 여인으로서 유방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유방이 죽고 나자 쌓였던 분노를 터뜨려 복수를 시작한다.
· 척부인(척희)을 인간돼지로 만듦
그리고 한고조가 죽자 여치의 아들이 이세 황제 '혜제 유영'이 된다. 그러자 여태후는 그동안 쌓인 분노를 터뜨려 복수를 시작한다. 먼저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독살시킨다. 그리고 척부인을 잡아 감옥에 죄수들에게 주어 강간을 당하게 한다. 그리고 사지를 자르고 눈을 뽑고,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고, 온몸의 구멍에 수은을 붓고, 돼지우리에 던져 놓아 '인간돼지'로 만든다. 그 모습을 본 '혜제 유영'은 정신 줄을 놓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23살의 나이에 일찍 죽게 된다. 그러나 여태후는 아들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나라의 전권을 잡고 섭정을 한다. 그 후 여태후는 유방의 아들 조유왕 유우를 굶어 죽게 만들고, 여씨 집안의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조공왕 유희는 그 본부인을 죽여 자결하게 만든다.
· 여씨 천하로 정치를 안정시킴
'혜제 유영'이 죽고 나자 여태후는 어린 '소제 유공'을 황제로 즉위시킨다. 그리고 나이 어린 소제 대신 섭정을 계속하여 여씨 천하로 만든다. 나중에 소제 유공이 생모가 여태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복수를 다짐하자 여태후는 그를 죽이고 '소제 유홍'을 황제로 즉위시킨다. 여태후는 귀족과 개국 공신들을 숙청, 억압하여 황제권을 강화하여 정치를 안정시킨다. 또 백성들에게는 가혹한 형벌과 무거운 세금을 경감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효과적인 농업정책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을 크게 증가시켜 나라를 안정시키는 기반을 잡게 된다. 그 결과 여태후가 죽은 이후 효문제과 효경제 시대에는 '문경지치'라는 태평성대가 오게 된다.
· 여태후의 사망
어느 날 여태후는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의 나타나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은 꿈을 꾸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집권한 지 팔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들은 유여의의 귀신이 나타나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는 권력을 위해 자기 아들까지도 죽게 만드는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산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녀가 죽자 신하 '진평'과 '주발'이 쿠데타를 일으켜 여씨 일족들을 죽이거나 숙청한다. 그리고 번쾌의 아내 '여수'도 채찍을 맞아 살해당한다. 또 '소제 유홍'을 끌어내리고 '문제 유항'을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 중국삼대악녀 여태후(여치, 폐후 여씨)와 인간돼지 '척부인', 네 명 현인
측천무후 (무조)
· 당태종의 후궁 무미랑
측천무후(624 ~ 705)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며 15년간 국호를 주나라라 칭하고 황제가 된다. 따라서 그녀를 무주의 여제인 측천무후라 한다. 그녀는 무사확의 차녀로 이름은 무조(무소의)이다.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낭자'라는 의미의 '무미랑'으로 불린다. 결국 태종이 사망하자 황실의 관습에 따라 출가하여 천조라는 이름의 비구니가 된다.
· 당고종의 후궁 무소의
그후 태종의 아들인 고종은 아버지의 여인을 들이는 것에 대해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궁으로 들인다. 한편 고종의 부인인 왕황후와 후궁인 소숙비 사이에 권력다툼이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숙청하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려고 그녀를 소의(무소의)로 봉하며 가까이한다. 그 결과 무소의는 이치의 장남 이홍을 낳고 왕황후와 함께 소숙비를 폐출시키고 비가 된다.
· 황후가 되다.
비가 된 후 무조는 왕황후를 반대하는 궁인들을 모아 그녀를 감시한다. 654년에 무조가 첫딸 안정공주를 낳는다. 이에 왕황후가 아기를 보고 가자 그녀는 딸을 목졸라 죽이고 시신을 이불로 덮어둔 뒤 왕황후의 소행이라 주장한다. 이 일로 당 고종 이치는 왕황후를 폐서인하고, 무조를 황후로 삼는다(655년). 황후가 된 무조는 왕씨와 소숙비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인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이무기), 효(올빼미)로 바꾸어 부른다. 그리고 자신의 황후 등극에 방해했던 공신들을 모두 숙청한다.
· 아들의 죽음
태종이 죽은 뒤, 승상 장손무기외 그의 일가를 몰살시키고 황태자 이충을 폐위시키고 장남 이홍을 앉힌다. 그후 이충과 드를 따르던 신하들을 대역죄로 몰아 처형을 시킨다. 장남 이홍이 부모인 고종, 측천무후와 함께 식사하는 도중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고 말자 다음 아들 이현(李賢 장회태자)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그러나 장회태자 이현은 여색을 좋아하며 노비 조도생과 친하게 지내 황태자에서 폐출당하여 유배를 간다. 그 후 무조는 구신적을 보내 이현이 자살하게 만든다. 그 후 무조는 자신의 셋째 아들인 심약하고 순종적인 이현(李顯)을 새로운 황태자로 삼는다. 당 고종 이치가 사망하자 이현이 황제가 되니 그가 중중이다. 얼마되지않아 무조는 다시 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로 만드니 그가 예종이다. 이때부터 무조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직접 정사를 다스린다.
· 황제가 된 측천무후
결국 690년 측천무후는 자신의 아들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가 된다.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린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룬다. 그녀는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고,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사원을 짓고 승려들을 양성시킨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비슷하였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따라서 그녀가 다스리던 시대를 '무주지치(武周之治)'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 황위 문제와 죽음
측천무후는 병에 걸리자 황위를 무씨에게 승계하여야 할 지 아니면 다시 당황조로 돌아가야 지를 결정하여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때 재상 장간지의 건의로 중종 이현이 황제가 됨으로써 15년 만에 당 황조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서태후(행아)
· 생애
서태후(자희태후 1835 ~ 1908)는 만주 예허나라 후이정 출신으로 말단관리의 딸로 태어나 이름은 행아 또는 행정이다. 그녀는 미모가 뛰어나 아름다운 노래로 황제 함풍제의 관심을 끌어 후궁이 된다. 그녀는 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이다. 따라서 그녀는 청나라 말기 3대에 걸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두른 황태후가 된다.
· 수렴청정과 동치제의 죽음
1860년 2차 아편전쟁이후 거액의 배상금과 영토를 할양하게 되고 북쪽 지방을 러시아에게 점령당하게 되자 9대 황제 함풍제는 정치는 배다른 동생 공친왕에게 맡기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다가 결국에는 병을 얻어 죽게 된다. 장례를 치르는 혼란한 틈을 타 서태후와 공친왕이 북경에서 계략을 꾸며 숙순 일당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권력을 잡게 된다. 그가 죽고 5살의 어린 동치제가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본격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녀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군대를 강화하고 신진 인재를 등용하는 등 정치를 잘 하였으나, 동치제가 성인이 되어 직접 정치를 하려고 하면서부터 모자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동치제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수렴청정과 광서제의 죽음
서태후는 본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 재첨을 양자로 들어 왕위에 앉힌다. 이 사람이 11대 황제인 광서제이다. 광서제도 4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서태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엄격히 교육하는 한편,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 쓰며 돈독한 모자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또한 황제의 결혼에 간섭하여 자신의 또 다른 조카인 정분을 광서제의 황후로 간택했으며, 두 후궁인 근비와 진비도 직접 고른다. 이처럼 서태후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권력을 넘겨주지 않자 광서제는 점차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에는 양무운동과 변법자강 운동이 일어나 근대화의 길로 가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서구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청나라를 침공하여 국력이 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구슬려서 서구열강과 대항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자기 안전만을 보장받고 열강의 요구를 받아들여 1901년 신축조약을 체결한다. 나라가 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사치를 일삼으며 본인의 권력 유지에만 골몰한다. 1908년 광서제는 누군가가 보낸 독약(비소)을 먹고 요절하였는데, 여기에도 서태후가 관여했다는 설이 강력하다. 광서제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서태후는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여 위장병과 이질로 죽어 가면서 급히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지명하고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 경국지색의 삼대 요녀(하 걸왕 말희, 은 주왕 달기, 주 유왕 포사)는?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 삼대 악녀(한 여태후, 당 측천무후, 청 서태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중국의 삼대 악녀라고 평가되어 왔던 그녀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들이 황권을 강화하여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그 뒤의 시기는 태평성대가 오는 것도 볼 수 있다. 권력 쟁취과정에서 저질러진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푼 것도 있는 듯하다. 서태후는 특히 죽어가면서도 "여인이 정치에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 같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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