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2세기말에서 3세기말까지 즉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에 나오는 인물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진수의 기천체 역사서 <삼국지>와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를 말한다. 삼국지에는 많은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현재 많이 인용되고 있는 사자성어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 국면을 크게 전환시키는 전쟁인 삼국지의 삼대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전투)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관도대전
· 시대적 배경
한나라 말 황건적 란으로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서 천하를 구하려는 결의를 한다. 한편 여포를 장군으로 가지고 있는 동탁은 환관 십상시의 난을 이후에 권력을 차지한다. 한편 조정은 동탁이 주축인 동탁군과 왕윤을 주축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이 서로 대치를 하고 있다. 이때 왕윤은 자기 수양딸인 초선을 보내 여포와 동탁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여포의 손으로 동탁을 제거하나 동탁의 부하 장군 이각과 곽사에 의해 왕윤은 죽고 여포는 도망을 간다. 그러자 어린 황제 헌제는 조조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결과 조조의 국정농단이 시작되게 된다. 한편 조조는 한때 친구이었던 하북의 패자 원소의 부하가 되라는 권유를 거부하고 세력을 키워 원소를 뛰어넘지 못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관도에서 전쟁을 벌인다.
· 원소의 공격
백마 전투를 전초전으로 시작하여 원소의 곁에 있던 유비는 여남에서 교란작전을 벌이며 조조 진영인 중원 일대를 둘러싸고 있다. 백마전투에서 밀린 조조는 관도에서 다시 군사를 정비한다. 관도대전(AD 200)은 관도에서 7만의 조조군와 그 10배인 70만의 원소군이 벌인 큰 전투이다. 백마전투에서 승리한 원소는 여세를 몰아 조조를 완전히 제압하려고 한다. 그러자 원소의 책사 저수가 지구전을 간언 하였으나 원소는 듣지 않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양무로 진격한다. 그러자 저수는 다시 본영은 그대로 두고 별군을 움직여 관도를 공격하라고 간언 한다 그러나 원소는 듣지 않고 본영을 움직여 서서히 진군하여 압박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이에 조조는 성안으로 들어가 수비만 한다. 원소는 50개의 토산을 쌓고 활을 쏘고, 지하도를 파서 공격하거나 망루를 만들어 활을 쏘면서 공격한다. 그러자 조조는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거나 땅굴에 물을 끌어들여 홍수를 일으키거나, 망루에는 발석거를 만들어 대응하며 굳게 성을 지킨다. 그러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병참과 식량 문제로 허도로 철수하여 결전을 벌일 생각을 하여 조조는 순욱에게 밀서를 보내자 순욱은 관도를 철수하면 안 된다고 답신한다.
· 책사 허유의 배반
한편 원소는 관도에 조조를 묶어두고 예주 전 지역이 원소에게로 돌아서도록 반란을 유도하여 조조는 점점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자 원소의 책사 허유가 군사를 나누어 허도를 기습하자는 계획을 건의한다. 그러나 당시 허유의 비리가 탄로 나 가족이 투옥되는 일이 있어 원소는 허유의 계획을 무시한다. 이에 허유는 원소의 좁은 그릇을 보고 몰래 조조 진영으로 투항을 한다. 조조는 원소의 군량미 창고를 공격할 방안을 허유에게 묻는다. 허유는 순우경이 주둔하고 있는 오소를 급습하라고 조언을 한다. 조조는 허유의 조언을 받아 원소군으로 위장한 5천의 군사로 원소의 군량미 창고인 오소를 기습 공격하여 불태워버리고 순우경을 죽인다. 이때 원소는 오소가 공격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조조의 진영이 비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오소를 구원하러 보내고 장합과 고람에게 주력군을 주어 조조 본진을 치러 보낸다. 그러나 원소의 구원병이 도착하기 직전에 오소의 군량미 창고는 다 불타게 되고 조조는 매복과 위장술로 원소의 군사를 모두 막아낸다.
· 장군 장합의 배반
군량미 창고가 불타게 된 원소 진영은 책임소재로 내분이 벌어져 장합이 배신하고 원소진영을 불태우고 조조에게 투항한다. 장합의 공격을 받은 원소는 기병 8백을 끌고 급히 도망치자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대혼란에 빠진다. 그 결과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승리를 하고 화북의 지배를 확립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는 중요한 기틀을 잡게 된다.
적벽대전
· 12만 개의 화살
적벽대전(AD 208)은 이 전투는 중국 후한 말 천하통일을 목표로 남하하는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장강(현재 양자강)에 있는 적벽에서 벌인 큰 해전이다. 조조의 군이 10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약 8천 척의 배를 만들어 적벽에 진을 친다. 유비 진영의 제갈량이 동오로 가서 강동의 손권을 설득시켜,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보를 부도독에 삼고 노숙을 군사로 삼아 조조와 전면전을 준비한다. 이때 주유가 제갈공명에게 10만 개의 화살을 열흘 안에 구해달라고 하자 제갈공명은 노숙에게 빠른 배 20 척을 빌려 짚단을 가득 싣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조조의 진영으로 가까이 나아가 화살 12만 개를 구해 온다.
· 주유의 계략
그리고 주유는 스파이로 온 장간을 역이용하여 조조가 수전에 능한 채모와 장윤을 의심하여 죽이게 한다. 또한 주유는 화공을 성공하려면 조조의 본진이 있는 배 가까이에 인화물을 싣고 가 충돌하거나 불화살을 쏘아 불을 붙여야만 한다. 따라서 주유는 황개의 고육지계를 받아들여 황개와 짜고 곤장 백대를 치는 등 처벌을 하여 조조가 황개가 군량미를 실은 20 척 배를 타고 투항하는 것을 믿게 한다. 그리고 화공이 완전히 성공하려면 8천 척의 배가 흩어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어야 했다. 이때 봉추 방통이 나서서 연환계를 쓴다. 그는 스파이로 온 장간을 다시 이용하여 같이 조조에게 가서 조조의 8천 척의 배를 한 턱에 작은 배 30척씩 서로 고리와 널빤지로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함선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 조조의 패퇴와 목숨 구걸
그런데 바람의 방향이 조조의 진영으로 부는 남동풍이 불어야 하는 데 제갈량이 남병산에 칠성단을 만들고 사흘 밤낮을 기도하여 저녁에 남동풍이 불게 한다. 이때를 맞추어 황개는 20척 배에 인화물과 짚을 가득 싣고 가 불화살을 쏘아 조조의 8천 척의 배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도망도 못 가고 모두 불탄다. 그러자 주유는 대선단을 이끌고 조조군을 공격하자 조조는 패하여 오림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이릉으로 후퇴한다. 호로곡에서 장비를 만나 또다시 도망간다. 100만에 달하던 조조의 군사는 이제 백명만 남아 화용도로 간다. 그곳에서 매복하여 있던 관우를 만나 목숨을 구걸한다. 관우는 과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조조를 놓아준다. 조조는 남은 군사 27명과 함께 남군성으로 간 뒤 다시 번성으로 도망간다. 다음 날 조조는 수도 허창으로 돌아간다.
· 전쟁의 결과
적벽대전의 결과로 손권과 유비는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이 된다. 한편 동오의 손권은 여세를 몰아 형주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군대를 동원해 형주의 조조군을 공격한다. 그 결과 1년간의 손권과 조조 간의 남군전투와 합비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릉전투
· 개요
이릉 전투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강동의 손권을 공격해 발발한 전쟁이다. 관우가 죽고 난 후 삼국의 정세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동오의 손권은 유비와의 전쟁을 피하려고 외교적으로 화친을 요구하나 유비가 거절하자 다시 위나라의 조비를 찾아가 지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위나라의 조비는 유비와 손권이 서로 싸워 힘이 약해지면 어부지리를 얻을 생각으로 중립을 취한다. 결국 유비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손권과 이릉대전(AD 221~222)을 벌인다. 그 결과 유비는 육손의 화공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나 병을 얻어 죽게 된다.
· 유비의 거병과 손권의 화친
221년 유비가 관우의 복수와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군사 75만을 일으켜 동오로 출정한다. 그러자 동오의 손권은 제갈근을 사신으로 보내 "손부인을 돌려보내고 형주 땅도 돌려주며, 장비를 암살한 범강과 장달을 보내주겠다."라고 제안하며 유비를 설득하려고 하나 유비는 거절한다. 그러자 손권은 할 수 없이 유비의 침공을 방어하려고 위나라 조비를 찾아 가 구원병을 요청하나 조비는 서로 싸워 힘이 약해지면 어부지리를 얻을 생각으로 중립을 취한다.
· 전투의 시작
유비의 군이 형주로 향하자 형주는 유비의 고향이라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대부분 탈환한다. 그리고 촉군은 손권의 조카 손환이 지키는 이릉성을 포위한다. 손권은 한당을 대장으로 10만 군사를 만들어 이릉성에서 포위된 손환을 구원하러 보낸다. 한편 노장 황충은 군사 7명만 데리고 싸우다 매복병의 화살을 맞고 부상으로 사망한다. 유비는 군사를 나누어 수군은 황권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직접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다. 관흥은 아버지의 청룡언월도를 반장을 죽이고 다시 찾는다. 유비의 촉군은 여러 곳에서 계속 승리한다.
· 동오의 화친 제의
전투가 계속 불리해진 손권은 장비를 죽이고 동오로 도망온 범강과 장달을 잡아 장비의 목과 함께 유비에게 보내며 다시 한번 화친을 제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들을 잡아 옷을 벗기고 100포형(죄인의 살을 한점 한점 회를 뜨서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화친을 거절한다.
· 대도독 육손의 계략
동오의 대도독이었던 여몽이 관우의 씌어 미쳐서 일곱 개 구멍에 피를 쏟으며 죽게 되자 손권은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탈환한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한다. 대도독이 되어 이릉성 근처 효정에 있는 동오의 진영으로 온 육손은 "모든 길목을 지키며 절대 나가 싸우면 안 된다."라고 명령하고 촉군과 대치만 계속한다. 대치 상황이 계속 진행되어 한여름이 되자 유비는 물을 구하기도 쉽고 그늘이 있는 강가 숲이 있는 곳에 영채를 옮기도록 명령한다. 멀리서 마속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제갈공명은 화공에 위험하니 영채를 옮기라고 하고 늦었으면 주군을 백제성으로 모셔야 한다고 급히 전령을 보낸다. 그러나 육손은 강가 숲 속으로 진영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에게 마른 띠풀을 하나씩 주어 불화살을 쏘며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한다. 겨우 목숨을 건진 유비는 남은 군사 100여 명과 함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결국 유비의 75만 군사가 대패하여 겨우 100여 명만 살아남게 된 것이다.
· 전쟁의 결과
백제성으로 도망온 유비는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이때가 AD 223년 봄 유비의 나이 63세이다. 유비가 죽자 아들 유선(아두)이 17세에 황제가 된다. 전쟁의 결과 동오는 형주를 완전히 차지하여 안정을 찾게 되나, 촉은 제갈공명의 출사표로 8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친 북벌을 진행한다. 결국 촉은 위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에도 형주를 잃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삼국 시대의 정치적 국면을 크게 전환시키는 전쟁인 삼국지의 삼대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전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 이후에 권력을 잡은 동탁을 물리친 이후 조조는 원소와의 대결인 관도대전에서 승리를 하여 완전히 천하의 패자로 등극한다. 원소는 패배 후 2년 만에 사망하고 그 영토는 조조에게 흡수된다. 나관중이 촉나라 유비 중심으로 쓴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게 참패한 적벽대전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조가 천하의 패자가 되는 관도대전이 삼국의 판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인 것이다.
※ 진수의 삼국지 구성과 개요, 장각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 십상시의 난
진수의 삼국지 구성과 개요, 장각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 십상시의 난
는 2세기말에서 3세기말까지 즉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에 나오는 인물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진수의 기천체 역사서 와 나관중의 역사소설 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말한다.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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