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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6대 고종실록 5 -고종의 가족들(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민씨, 이은, 이강)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22.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1852 ~ 1919)의 이름은 이희(李熙)이며 아명은 명복(命福)이고 초명은 이재황(李載晃)이다. 고종은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된다. <고종실록>는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43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일본의 총독부가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여기에서는 지난시간에 이어서 고종의 가족들(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민씨, 이은, 이강)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흥선대원군

 

고종의 가족들

· 고종의 가족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의 자식을 얻는다. 명성황후 민씨에게서 1남(이척(순종)), 귀비 엄씨에게서 1남(이은(영친왕)), 귀인 이씨에게서 2남(완친왕(사망), 이육), 귀인 장씨에게서 1남(이강(의친왕)), 귀인 정씨에게서 1남(이우(사망)), 귀인 양씨에게서 1녀(덕혜옹주)를 낳는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 ~ 1898)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 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진군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영조의 고손자가 된다. 12세에 어머니, 17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843년에 흥선군에 봉해지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한직으로 임명되는 등 불행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철종 시대에는 안동김씨가 권력을 독점하여 왕실과 종친에 위협을 가하여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시정 잡배와 어울리며,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도 하는 등 자신을 숨기고 낮춘다. 그러던 중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신정왕후 조씨(조대비) 결탁하여 1863년 12월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린다. 신정왕후 조씨(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위임한다. 이후 10년 간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비변사 폐지하고 의정부 삼군부 부활시킨다.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서원 철폐하고,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며 사창제를 실시하고,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 실시한다. 그리고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중건한다. 이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징수하고, 통행세를 거두고 백성에게 노역을 부과하여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이와 같이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세도정치의 폐해를 일소한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같은 무리한 정책이나 세계정세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쇄국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어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고종은 외척세력이 싫어한 나머지 몰락한 양반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며느리인 명성황후 민씨에 의해 정치에서 밀려나게 된다. 고종이 22세의 성인이 되자 친정을 원하였고, 고종의 비로 입궁한 민씨가 노대신과 유림들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하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 낸다. 그 결과 1873년11월고종은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을 왕명으로 폐쇄한다. 대원군은 섭정 10년 만에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게 된다. 조정은 왕비 여흥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된다.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은 왕비를 미워하며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꿈꾼다. 1898년 7월 흥선대원군은 안경수와 함께 군인들을 매수하여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을 옹립하며 국왕 폐립 음모를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다. 그후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청나라 원세개가 개입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3년 동안 유수 생활을 하게 된다. 그후 원세개와 같이 돌아와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러 조약을 체결하자 원세개와 짜고 큰아들 이재면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농민세력과 연합하려고도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때에는 군국 기무를 총괄하기도 하였으나 은퇴를 강요당해 쫓겨난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아관파천함에 따라 실각하고 곧은골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 후 1898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흥원으로  여흥부대부인 민씨(순목대원비)와 함께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 명성황후 민씨(1851 ~ 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8세에 아버지가 죽고, 1866년 흥선대운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한살 어린 고종과 가례를 올린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뛰어나 왕비가 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그녀는 흥선대원군이 궁녀 이씨의 소생 완화군을 편애하여 세자로 봉하려고 하자 이때부터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싫어하게 된다. 그후 그녀는 대원군의 정적 세력인 안동김씨, 조대비, 대원군의 장자 재황, 유림의 최익현 등과 결탁한다. 1973년 마침내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 내어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된다. 그녀는 고종을 움직여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몰래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한다. 몰래 고종에게 연락하여 청나라 원세개를 불러 대원군을 청나라로 끌고 가게 하여 정권을 잡는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3일 동안 정권을 잃었다가 청국의 도움으로 다시 찾는다. 그녀는 1894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를 수습하며, 러시와도 접촉하고 청나라에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하고 민첩성있는 외교를 펼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자신을 제거하려하자 그녀는 친러정책을 쓰면서 삼국간섭으로 국제적으로 지위가 실추된 일본에 노골적으로 대항한다. 이에 일본 미우라 공사는 1895년 일본 군인들과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비를 시해하고 그녀의 시체를 불태우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러세력과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한다. 그녀의 능은 홍릉으로 고종과 함께 남양주시 금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영친왕이방자

· 영친왕 이은(1897 ~ 1970)

고종의 넷째 아들로 귀비 엄씨의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으로 봉해지고, 1907년에 황태자로 봉해져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다. 그후 1910년 순종이 폐위되자 황세제로 격하된다. 1920년 일본 왕족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한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며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중장으로 지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국내 정치 사정으로 환국하지 못하고 한국인으로 있다가 1963년 11월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한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실어증에 시달리다가 1970년 지병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능 내에 이방자 여사와 함께 묻혀있다. 슬하에 진과 구 두 아들이 있다. 

 

· 의친왕 이강(1877 ~ 1955)

고종의 셋째 아들로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고 영왕 이은의 이복형이다. 15세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김사준의 딸과 결혼을 한다. 1900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해 의왕에 봉해진다. 그는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적십자 총재가 되어 활동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지내다가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을 모의하다가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소환된다. 그후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과 6.25 전쟁을 경험한 후 빈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슬하에 우와 건 등 13남 9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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