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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6대 고종실록 3 - 고종의 치세와 사건들(1897~1904), 대한제국 광무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21.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1852 ~ 1919)의 이름은 이희(李熙)이며 아명은 명복(命福)이고 초명은 이재황(李載晃)이다. 고종은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된다. <고종실록>는 총 52권 52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863년 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43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일본의 총독부가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대한제국 이후의 고종의 치세와 사건들(1897 ~ 1904)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고종

 

고종의 치세와 사건들(1897~1904)

·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1897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 후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초대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고, 직접 대원수가 되어 육해군 통솔하고, 황태자를 원수에 임명하는 등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 독립협회

1897년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결성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대한 독립의 공고화, 입헌군주제의 수립과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고종은 보부상들의 모임인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두 단체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킨다. 

 

· 고종의 신변 위협 

1898년 7월 안경수가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 실패한다. 1898년 8월 2일 고종에게 앙심을 품은 러시아 역관 김홍륙이 커피에 독극물(아편)을 타서 대접한다. 고종은 마시지 않고 커피를 땅에 부었으나, 고종의 아들 순종은 이를 마시고 치아가 모두 상하여 틀니를 착용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고종은 김홍륙을 체포한 후 교수했으며 김홍륙의 구족을 멸한다. 


· 이준용의 쿠데타 기도
1899년 고종의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으로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활동할 때 1899년 1월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으며,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장윤상은 교형에 처해졌고, 신현표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또 3월에는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1899년 6월에는 윤태영 등 3인이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온다. 이에 고종의 신하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계속 올렸지만 고종은 윤허하지 않는다. 6월 3일 궁내부협판 윤정구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1900년 6월 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오게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일본정부는 정치 망명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 옹호한다. 이에 고종은 자객들을 일본으로 파견하지만 이준용이 거구이고 민첩하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어 제거 계획은 번번이 실패한다.

· 고종의 치세

1899년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다.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킨다. 행정개혁은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였다. 알렌의 소개로 에디슨의 회사에 전차와 전기에 대한 권리를 팔기도 하였다. 1902년에는 간도에 간도시찰원을,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고종 황제 폐립 음모 사건을 일으킨다. 


·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과정
러일 전쟁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의 인천 · 마산 · 원산 상륙,  서울 · 덕수궁 점령
한일의정서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 내 일본군 주둔
제1차 한일 협약 1904년 8월 22일 고문정치
대한제국군 감축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 친위대 해산, 시위대 · 진위대 감축
화폐정리사업 1905년 ~ 1909년 조선후기 상업자본 몰락, 화폐경제 붕괴, 일본 화폐에 예속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 통감정치
고종 양위 사건 1907년 7월 20일 고종 강제 퇴위, 순종 즉위
정미7조약(제3차 한일 협약) 1907년 7월 24일 차관정치
대한제국군 해산 1907년 8월 1일 시위대 ·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 정미의병 발발
기유각서 1909년 7월 12일 일본 제국에 사법권 · 교도행정권 위탁
남한 대토벌 작전 1909년 9월 1일 전체 의병 소탕, 항일의병 만주 대이동
한일약정각서 1910년 6월 24일 일본 제국에 경찰권 위탁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 일제강점기 탄생

· 고종의 국권 침탈 대비
1900년 9월 27일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육군 참위 김규복,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고,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준비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 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한양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그 뒤 고종은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이러한 고종의 군대 창설 및 국권침탈 대비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급기야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군대가 해산이 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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