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대전이 일어나기 전 한나라 주변 상황은 조조는 천자를 등에 업고 허창, 낙양, 장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고, 강동에는 손견의 아들 손권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리고 기주를 중심으로 하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원소가 있었다. 관도대전에서 패한 원소가 죽자 아들 간의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조조는 이틈을 이용해 원소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을 함락시키고 화북지역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관도대전 이후에는 화북의 전체를 차지한 조조, 강동의 손권, 형주의 유비의 세 지역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관도대전 이후 유비의 삼고초려, 서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 박망파 전투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유비의 책사 제갈공명
· 서서
유비는 세명의 아우들과 형주의 유표가 제공한 형주 북쪽의 신야성에서 잘 지내고 있다. 하루는 유표가 나이가 들어 후사를 정하는 문제로 유비에게 상의를 한다. 유비는 당연히 첫째 부인의 아들인 유기가 승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병풍 뒤에서 자기 아들이 승계되기를 원하는 둘째 부인 채부인이 듣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인 장군 채모를 시켜 마을 잔치를 열어 유비를 죽이려고 초대한다. 잔치에 참석한 유비는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도망을 치고 신야성으로 가던 중에 서서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서서를 책사로 삼아 군사를 지휘하게 한다. 얼마 후 조조의 영토 번성을 지키던 조인이 '팔문금쇄진'을 치고 공격을 해오자 서서는 그 진의 약점인 후방을 조자룡을 시켜 공격하게 하여 진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중앙을 관우와 장비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여 조인과 이전을 격퇴하고 번성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가 서서의 재능을 탐내자 군사 정욱이 꾀를 쓴다. 정욱은 서서의 어머니 서모를 후하게 대접하자 서모가 감사의 편지를 쓴다. 정욱은 그녀의 필체를 흉내 내어 서서에게 허도로 돌아오라는 거짓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고 조조의 계략인 줄 알면서도 서서는 유비와 헤어지면서 조조를 위해서는 어떠한 계책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대신에 와룡산에 거주하고 있는 성은 제갈이고 이름은 량, 자는 공명인 제갈량을 천거한다. 그리고 둘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한다. 서서는 조조 진영의 어머니를 만났으나 서모는 어진 군주를 버리고 허도에 왔다고 "네 이놈! 조조가 어떤 인간인지 몰랐느냐! "라고 꾸중하면서 "여자가 글을 안다는 것이 걱정을 낳게 하였다(女子識字憂患)."라고 한탄한다. 여기에서 식자우환(識字憂患) 즉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가 유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조조의 책사이었지만 어떤 계책도 주지 않는다.
· 삼고초려
유비가 제갈공명을 책사로 모시기 위해 초야에 있는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귀한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할 때 정성을 들여 여러 번 부탁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이다. 참고로 제갈량의 나이를 살펴보면 26살로 유비보다 21살 적고 관우보다 20살, 장비보다 15살 작다. 그런 제갈량을 유비는 처음에 관우, 장비와 같이 신록이 무성한 여름에 제갈량의 오두막을 찾아가자 귀인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여행을 떠나 못 만나고 온다. 계속 시종을 보내 알아보다가 흰 눈이 내리는 겨울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두 아우와 같이 찾아간다. 그러나 또 못 만나자 화가 난 장비는 제갈공명의 삼 형제(제갈근, 제갈량, 제갈균) 중 막내인 제갈균의 멱살을 잡는다. 그러자 유비는 말리고 예를 갖추고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따뜻한 봄에 유비는 세 번째로 두 아우와 같이 마을 입구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며 찾아가자 낮잠을 자고 있는 제갈량을 만나게 된다. 낮잠 자는 모습에 화를 내는 장비를 달래며 관우와 장비는 땔감을 구하러 자리를 피한다. 잠에서 깨어난 제갈량은 동쪽 강동의 손권과 동맹을 하고 북쪽 조조는 견제하면서 형주와 서천의 땅을 차지하는 전략인 천하삼분지계를 유비에게 설명한다. 유비는 깜짝 놀라며 감탄하고 이렇게 하면 20년 안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그러던 중에 장비는 밖에서 옆의 작은 초가에 불을 지른다. 유비는 일을 그르쳤다고 실망하여 눈물을 흘리자 제갈량은 그의 인품과 간절함에 감복을 하고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말한다. 한편 제갈량은 와룡 또는 복룡이라 불리며 유비의 책사로 촉나라의 초대 승상을 지낸다.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 마크(상징물)는 학의 깃털로 만든 부채인 학우선과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인 와룡관이다. 그와 관련된 현재 많이 인용되고 있는 고사성어로 삼고초려, 수어지교, 출사표, 난공불락, 칠종칠금, 읍참마속 등이 있다. 앞으로 사건에 따라 하나씩 알아보기로 하자.
제갈공명의 활약
· 제갈량의 전쟁준비
유비는 제갈량을 스승으로 대하며 천하의 일을 모두 논의한다. 그러자 관우와 장비는 어린 제갈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는 사건들을 살펴보자. 제갈량은 신야성으로 들어오자 제일 먼저 군량미 확보와 군사훈련에 집중한다. 수확한 농작물의 일부만 가져가는 대신에 농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군사들은 일과 후에 농사를 돕게 하는 둔전을 실시하여 군량미를 확보한다. 그리고 다양한 병법으로 군사들을 훈련시켜 강한 군대로 만든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조조는 유비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하후돈을 시켜 10만의 군사를 끌고 신야성을 공격한다. 유비는 제갈량이 훈련시킨 군사가 3천 명뿐인데 10만의 군사가 쳐들어 오니 급하게 관우와 장비를 부른다. 제갈량을 미워하던 장비는 "일전에 제갈량을 얻었을 때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번 전쟁에 대단한 물을 내보내면 되겠네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물고기가 물을 만나 것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잘 맞는 사이'를 의미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된다.
· 박망파 전투
제갈량은 관우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박망파 왼쪽의 예산 기슭에 매복하여 있다고 불을 신호로 보급부대를 공격하고 장비에게도 군사 1000명을 주어 안림 뒤쪽 산골 숲에 매복해 있다가 신호에 맞춰 하후돈 진영 박망성에 불을 지르게 한다. 또 관우의 양자 관평과 유비의 양자 유봉에게는 군사 500명을 주어 박망파 뒤 양쪽에 매복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자룡에게 군사 500 명을 주어 선봉으로 최전방에 나가 하후돈과 전투를 벌이다 거짓 후퇴하여 하후돈을 유인하라고 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남은 군사 500명을 이끌고 미축, 미방과 함께 신야성을 지키기로 한다. 그러자 유비가 제갈량의 말에 따르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수들도 따르기로 한다.
한편 하후돈은 군사를 둘로 나눠 5만 명은 전방부대로 삼고 나머지 5만 명 후방부대로 군량과 마초를 호위하며 전진하게 한다. 박망파 바로 앞에 이르자 유비의 조자룡이 하후돈을 습격하자 이에 하후돈은 부장 한호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자룡을 추격한다. 그러자 유비가 군사를 끌고 나와 하후돈을 공격하더니 조자룡과 함께 후퇴한다. 날이 저물자 하후돈은 계속 추격하였으나 뒤를 따르던 우금과 이전이 갈대밭에서 유비군의 화공을 받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자룡이 하후돈은 급습해 하후돈은 그대로 불길을 헤집고 달아났다. 한편 후군에 남아 있던 이전은 박망성으로 급히 갔으나 도중 관우를 만나 간신히 달아나고 우금도 군량과 마초에 불이 붙자 그대로 도주한다. 이에 하후란과 한호가 군량과 마초의 불을 잡으려 왔다가 장비와 맞닥뜨려 하후란이 죽자 한호도 그대로 도망간다. 결국 다음날 하후돈은 달아난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 겨우 3000명만 허창으로 돌아간다. 박망파 전투는 책사 제갈공명의 첫 번째 전투로 그동안 불만을 가졌던 관우와 장비 등 모든 장수들은 제갈공명을 진정한 군사로 존경하게 된다. 전쟁에서 대패한 하후돈은 죽기를 각오하고 스스로 밧줄로 꽁꽁 묶고 조조 앞에 엎드리며 죽여달라고 하자 조조는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 상사이다."라고 하며 그를 용서해 준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유비의 삼고초려, 서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 박망파 전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유비는 장수만 있었지 머리를 쓰는 책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제갈공명을 만나 그를 책사로 삼고 벌인 첫 번째 전투가 박망파 전투이다. 관우와 장비 등 많은 장수들은 유비가 자기 보다 21살이나 어린 아들 같은 제갈공명을 스승으로 깍듯이 대접하자 불만을 가진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박망파의 전투에서 그러한 불만을 일시에 없애 버리고 오히려 진정한 군사로서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러자 조조는 박망파 전투에서 10만의 군사로 패배하게 되자 직접 50만의 군사를 일으켜 유비와 형주정벌에 나서게 된다. 다음 시간에는 유비와 조조와의 전쟁인 신야성전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신야성 전투와 상산 조자룡의 활약, 유표 유기 유종, 감부인 미부인 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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