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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15대 숙종 - 출생과 즉위 및 숙종의 업적 및 가족과 사망, 별무반 해동통보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13.

고려 제15대 국왕 숙종(肅宗, 1054 ~ 1105)은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계림공 희(熙)이다. 재위기간은 1095년 11월부터 1105년 11월까지 10년이다. 계림공 왕희는 1095년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11살 조카 헌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숙종)이 된다. 숙종은 개경의 중양귀족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군주가 된다. 이는 조선에서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의 경우와 비슷하다.

숙종

 

출생과 즉위

· 출생

숙종(肅宗, 1054 ~ 1105)은 문종과 인예왕후 이씨 사이의 10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이름은 계림공 희(熙)로 나중에 옹(顒)으로 개명한다. 왕희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뛰어나 오경과 사서 등에 해박하였으며 부지런하고 과감했다. 1077년에는 계림공에 책봉되었다. 그의 친형인 선종 말기에 유력한 왕위 계승자 중에는 계림공 왕희, 대각국사 의천, 조선공 왕도, 상안공 왕수, 보우승통 왕규, 부여공 왕수, 진한후 왕유 등의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끝에 계림공 왕희가 유력하였다. 당시 태자인 왕욱은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건강이 나빴으므로 조정 중신들은 계림공 왕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라 생각했다. 

 

· 즉위

그러나 1094년 6월 선종은 태자 왕욱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나중에 비극을 자초한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헌종이 즉위하자 어머니 사숙태후 이씨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자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이자의의 난이 일어난다. 이에 1095년 7월 계림공 왕희는 소태보와 왕국모와 함께 외척세력인 이자의 일당을 제거하고, 10월 무기력한 헌종의 선위를 받아 42세의 나이로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고려 제15대 국왕 숙종이다. 그는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점에서 조선의 수양대군 세조의 경우와 비슷하다.

 

 

숙종의 업적

고려 제15대 숙종(肅宗)은 1095년부터 1105년까지 10년 동안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그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는 인물로, 강력한 왕권과 화폐주조를 통해 고려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 왕권 강화

숙종은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인주 이씨 세력을 중앙정계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소태보, 왕국모 등 역모세력 제거에 공이 많은 공신들을 요직에 앉힌다. 또한 중앙군 2군 6위의 약점을 보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 직속의 견룡군을 창설하고 군부의 친위화를 실시한다. 또한 1099년 김위제의 상소를 받아들여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남경(현재 서울)에 궁궐을 조성하여 등 남경 건설을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한다. 

 

· 별무반 설치

고려 숙종 때 별무반은 1104년(숙종 9년)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임시 군사 조직으로 1. 신기군(기병), 2. 신보군(보병), 3. 항마군(승병)으로 구성되었다. 별무반은 기존의 군사 체제와는 달리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4계절 훈련을 통해 여진족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준비하였다. 1107년(예종 2년) 윤관의 별무반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지역에 9성을 쌓는 공을 세운다. 별무반은 여진 정벌이 끝나자 해체되었으나 고려의 군사 제도에 큰 영향을 준다.

 

· 화폐 주조

1097년에 주전관, 1101년에 '주전도감'이라는 화폐 주조를 총괄하는 관청을 설치한다. 1102년에는 해동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화폐 유통을 촉진하고 경제를 안정시킨다. 1101년에는 은 1근으로 만들어 당시 쌀 50석, 포 100 필에 해당하는 높은 가치의 활구라는 은병을 주조하여 화폐로 사용했다. 또한 숙종은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개경의 거리에 술집과 점포를 열어 동전 사용을 장려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숙종은 화폐 주조와 유통을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남경 건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결국 숙종의 화폐 주조 정책은 고려의 경제 발전왕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 기타

1096년 숙종은 6촌 이내 혼인을 금하는 족내혼 금지법을 공포였으나 왕실이나 민간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1102년 숙종은 기자의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라는 예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경에 기자사당건립한다. 

 

 

가족과 사망

· 가족

숙종은 문하시중 유홍의 딸 명의왕후 유씨에게서 7남(예종 왕우, 상당후 왕필, 원명국사 징엄, 대방공 왕보, 대원공 왕효, 제안공 왕서, 통의후 왕교), 4녀(대령궁주, 흥수궁주, 안수궁주, 복녕궁주)의 딸을 둔다. 나중에 예종을 제외한 숙종의 자식들은 모두 요절하거나 이자겸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된다. 

 

· 사망

1105년 9월, 숙종은 서경의 동명왕릉에 제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영릉(英陵)으로 개성시 선적리에 소재하고 있다. 숙종 이후에는 전부 숙종의 직계 자손(예종 →인종 → 의종, 명종, 신종 → 희종, 강종 → 고종 → 원종)들이 왕이 된다. 따라서 숙종은 이후 왕가의 시조이기 때문에 숙조(肅祖)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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