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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마천 사기

제 환공(소백)의 춘추오패 등극과 관포지교, 관중과 포숙아, 문강공주

by 이야기마을촌장 2023. 11. 10.

우리는 여기에서 '제 환공의 춘추오패 등극과 관포지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춘추시대 5명의 영웅을 춘추오패(제환공, 진목공, 송양공, 진문공, 초장왕)라 한다. 그중 제일 먼저 패자로 등극한 사람이 제나라의 16대 임금인 환공(BC 685 ~ 643)이다. 제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환공을 춘추오패가 되게 만든 재상 관중에 대해서 알아보자. 또 그를 환공에게 추천하여 큰 역할을 하게 만든 친구 포숙아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관중과 포숙의 우정 '관포지교'를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보고자 한다.  

관포지교

제 환공의 즉위와 관중의 등용

소백(후에 제환공)의 형인 제 양공은 이복누이인 문강공주와 근친상간을 한다. 그러던 중 문강공주는 노나라 왕 환공에게 시집을 간다. 시집간 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사실을 노환공이 알게 되자 문강공주는 양공에게 연락을 한다. 이에 양공은 사람을 보내 노환공을 죽이게 한다. 이러한 형이 두려워서 동생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간다. 공자 규는 소홀과 관중이 모시고 노나라로 피신하고, 공자 소백은 포숙이 모시고 거나라로 피신하였다. 그 후 공손무지가 제 양공을 살해하고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신하가 그를 죽이자 제나라에는 왕이 없는 세상이 된다. 이에 노나라로 있는 공자 규와 제나라로 피신한 공자 소백 사이에 왕위 계승의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포숙이 모신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에 길목을 지키던 관중이 화살로 그를 쏜다. 그러나 소백은 벨트에 맞고 죽지 않았다. 이를 모르는 관중은 돌아간다. 결국 왕위는 소백이 차지하게 된다. 왕위 싸움에 실패한 관중일행은 노나라로 가서 숨는다. 그 후 제나라 왕이 된 소백은 노나라 왕을 위협한다. 위협에 못 이겨 노나라 왕은 왕자 규를 살해한다. 그리고 소홀은 자살을 한다. 그 후 관중은 제나라로 압송된다. 이에 포숙아는 왕에게 "제나라만 경영하려면 관중이 없어도 되나 중원의 패자가 되려면 관중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이에 제환공은 삼흔삼욕을 하고 관중을 맞이한다. 

 

 

관중의 개혁정치와 제 나라의 부강

관중은 신분이동이 가능한 사농공상, 전문가를 중시하는 정책, 부국강병 실용주의 정책을 추진한다. 그 결과 제나라를 춘추시대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든다.

  • 경제개혁 : 농업과 상업을 적극장려, 토지와 재산에 대한 과세 정비, 소금생산과 철광석 채굴을 지원한다.
  • 군사개혁 :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사훈련과 장비를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최고로 강한 군대로 만든다. 
  • 정치개혁 : 행정체계를 개편하여 법률과 규칙을 정비하고, 부패와 낭비를 억제한다. 

 

 

관중의 사후와 제 환공의 몰락  

관중이 병이 들자, 제환공은 "다음 재상을 시킬만한 사람은 누구요?"라고 관중에게 묻는다. 이에 관중은 등용시키면 안 되는 사람(간신:  수조, 역아, 개방, 상지무)을 말해 준다. 그러나 환공은 그들을 그대로 국정에 등용시켜 나라가 점점 망하게 되었다. 환공이 늙고 병이 들자 자식들은 왕위계승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제나라 환공이 죽게 되자 간신 역아와 수조는 환공의 유언(공자 '소'를 왕위에 올리는 유언)을 조작하여 후궁 장위희의 아들 공자 무휴를 왕위에 올린다. 간신 개방과 공자 반은 위나라로 망명하고, 공자 소는 송나라로 망명한다. 공자 소는 송 양공에게 군사를 빌려 공자 무휴를 공격한다. 그리고 공자 무휴와 간신 수조를 잡아 참수형에 처한다. 그가 후에 제나라 효공이다. 제나라 환공이 죽은 후에는 환공의 아들인 무휴, 소, 반, 상인 등이 골육상쟁을 벌이며 번갈아 왕위에 올랐다. 제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중원의 패권은 진(晋)나라, 초나라로 옮겨지게 된다.

 

 

관포지교의 의미와 교훈

관중과 포숙의 인간관계는 현대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 특이한 관계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관중은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아 보이며 이에 비해 포숙은 너무 순진하다. 심지어 바보같이 어리석어 보인다. 관중이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제 환공은 다음 재상으로 포숙을 시키면 어떠하냐고 물었다. 관중은 "포숙은 아니되옵니다. 그는 강직하고 괴팍한 사나운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고 포숙은 "역시 관중이다. 사사로운 인연으로 대업을 망치지 않는 사람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조차도 <논어> 헌문편에서 ' 관중의 사람됨이 인(仁) 하지 못하다'라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세상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 포숙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더 칭찬하였다.'라고 포숙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관중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무심하다. 그러던 관중은 마지막에는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라고 말한다. 관중은 '포숙이 너무 강직해서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포숙은 그런 관중을 끝없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 후 관중이 죽자 포숙은 재상 오르지 않고 은퇴하였으며 자손 대대로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잘 지냈다고 한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어린 시절에 포숙이 진흙탕을 건너 과일을 따서 관중에게 주었으나 관중은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린다. 그럼에도 포숙은 관중이 키가 크고 덩치가 크니 많이 먹어야 한다고 이해를 한다. 
  • · 청년시절에 포숙과 붓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분배할 때 내가 더 많이 가져가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욕심 많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과거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일을 하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힘들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 또 내가 일전에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는데,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직 내가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그리고 내가 싸움에 세 번 나가 세 번 다 도망쳤을 때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싸우다가 지게 되어, 소홀은 죽고 나는 붙잡혀서 굴욕을 당할 때에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작은 일에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맺음말

위에서 우리는 제 환공의 춘추오패 등극과 관포지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 환공을 춘추오패가 되게 만든 관중의 지략과 지혜도 뛰어나지만 그보다 그의 친구 포숙의 끝없는 믿음은 정말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믿음과 신뢰를 가벼이 생각하는 요즈음 현대사회에서 관중과 포숙의 우정은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다. ※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습니다. 춘추오패 '초장왕'과 불비불명, 절영지연, 문정경중, 음덕양보, 투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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