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사

제18대 의종 - 의종의 치세 및 사치와 향락, 무신정변과 김보당의 난, 관악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19. 17:08

고려 제18대 국왕 의종(毅宗, 1127 ~ 1173)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현(晛)이다. 재위기간은 1146년 4월부터 1170년 10월까지 24년 6개월이다. 의종은 즉위 초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문신 세력과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재위 후반에는 무신 세력의 불만이 커지면서 1170년 무신정변이 발생한다. 의종은 폐위되어 거제도로 유배된 후 1173년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이의민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국왕이다.

의종

 

출생과 즉위

· 출생과 즉위 

의종(毅宗, 1127 ~ 1173)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 사이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이름은 현(晛)이다. 어머니 공예왕후는 둘째인 대령후 왕경을 좋아하여 태자로 앉히려고 하였으나 정습명의 반대로 첫째인 왕현이 태자가 된다(1133년). 그 후 정습명은 태자의 사부가 되어 태자를 가르친다. 1146년 아버지 인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장남인 왕현이 왕이 된다. 그가 바로 고려 제18대 국왕 의종이다. 

 

 

의종의 치세

· 왕권 강화 노력

의종은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한다. 군사 활동을 강화하며 친위군을 조직하고 무신들을 등용한다. 그러나 문신 세력과의 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나중에 무신정변의 계기가 된다. 또한 경쟁자이던 동생 대령후 왕경을 유배를 보내 숙청한다.

 

· 문헌 편찬

의종 재위 시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부터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김관의가 편찬한 <편년통록>과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예법을 정리한 최윤의 등 17명의 학자들이 편찬한 <상정고금례> 50권 같은 중요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나 현재 둘 다 전하지 않는다. 

· 음악과 사상

의종은 열병과 격구에 관심이 많았으며, 관악이라는 당악 요소를 강화하는 음악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유교, 불교, 도교 즉 유·불·선을 아우르는 사상을 추진하여 고려 정치에 반영하려 했다. 이와 같이 의종은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 문화적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지만, 그의 통치는 무신정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의종의 사치와 향락

· 배경

의종이 즉위하자 금과 북송을 등에 업고 조정을 흔드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1147년 이숙, 유혁 등이 금나라를 등에 업고, 1148년에는 이심, 지지용 등이 송나라를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한다. 이러한 역모들이 의종의 방탕한 생활이라고 대신들은 측근인 환관과 내시를 처벌하라고 공격한다. 이에 의종은 굴복하고 내시와 환관들을 귀양을 보낸다.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한 의종은 김존중 등과 격구를 즐기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자 사부인 정습명이 의종에게 실망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 사치와 향락

그때부터 거칠 것이 없어진 의종은 동생인 대령후 왕경을 제거하려고 그 측근들을 숙청한다. 환관정치의 주역인 내시 정함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점쟁이를 궁궐에 불러 미신에 의탁한다. 그러자 대신들은 내시 등의 측근들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자, 의종은 할수없이 내보냈다가 김존중이 등창으로 사망하자 다시 불러들인다. 정사에 흥미를 잃은 의종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다. 또한 의종은 별궁을 짓고, 신하들의 저택을 궁으로 만들며, 연못을 만들고 폭포를 조성한다. 그리고 애첩 무비와 문신들을 이끌고 전국 이름난 사찰을 돌면서 향락에 빠진다. 심지어 미모가 뛰어난 누이 덕녕궁주를 궁으로 불러들여 어울린다. 이렇게 의종의 사치와 향락에 위해 동원된 무신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무신정변과 김보당의 난

· 무신정변(1170년)
의종은 왕광취, 백자단 등 자신의 왕권을 지지하는 내시 환관 세력들의 폐단이 커지자,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이공승 등 문벌귀족 세력을 등용한다. 이것이 더욱 무신들의 불만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167년 의종이 봉은사 연등행사에서 환궁하는 도중 김돈중의 말이 놀라 화살통에 부딪히면서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졌다. 이를 의종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로 오해를 한다. 결국 대령후 왕경의 가동(家僮)인 나언은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하여 범인으로 몰려 처형되고 견룡군 의 많은 무신들이 귀양을 가게 된다. 이 사건을 김돈중의 유시(流矢) 사건이라 한다. 그러는 중에 문신 김돈중이 나이가 많은 상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그슬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무신들의 불만은 점점 팽배해져만 갔다. 1170년(의종 24) 8월, 의종이 보현원에서 문신들과 연회를 하며 무신들을 멸시한다. 특히,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분노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한 후,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여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한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하며 그 결과 무신들은 문신중심의 정치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의종은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된 후 김보당의 난이 일어나자 경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이어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김보당의 난(1173년)
1173년(명종 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 등 의종 복위운동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거제도에 유배된 의종을 경주로 피신시키고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무신 정권은 이의민, 박존위를 보내 김보당과 반란군을 모두 진압한다. 의종은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 연못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여 버리고 시체는 동경의 연못에 던져버린다. 김보당의 난 결과 문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무신정권은 더욱 공고해진다. 

 

가족과 사망

· 가족

의종은 제1비 장경왕후 김씨와 제2비 장선왕후 최씨 그리고 후궁인 무비 등 3명의 부인이 있다. 자식으로는 장경왕후 김씨에게서 1남(효령태자), 3녀(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를 얻는다. 

 

· 사망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등뼈가 부러져 사망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고 그에 의해 의종의 능  희릉(禧陵)이 조성된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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