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사

제17대 인종 - 출생과 즉위 및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삼국사기, 김부식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18. 21:53

고려 제17대 국왕 인종(宗, 1109 ~ 1146)은 예종과 순덕왕후(문경태후) 이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해(楷)이다. 재위기간은 1122년 5월부터 1146년 4월까지 23년 11개월이다. 인종은 아버지 예종을 뒤를 이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된다. 그러자 외조부 이자겸이 자신의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왕의 장인까지 되어 장수 척준경과 손을 잡고 외척정치를 시작한다. 결국 인종은 외척세력인 이자겸의 난, 서경의 귀족 세력인 묘청의 난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 강화문화와 학문 진흥에 노력한 왕이라 할 수 있다. 

인종

 

출생과 즉위

· 출생
인종(宗, 1109 ~ 1146)은 예종과 순덕왕후(문경태후) 이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해(楷)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예술에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음률과 서화에 뛰어났다. 1115년, 7살의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된다.

· 즉위
1122년, 아버지 예종이 서거하자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아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러자 외조부인 동시에 장인이 된 이자겸이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하며 외척정치를 펼쳤으나, 그의 지나친 권력 욕심으로 이자겸의 난으로 이어진다. 인종은 이를 극복하며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인종의 즉위와 초기 통치는 고려 중기의 정치적 혼란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

 

 

정치적 안정 

· 이자겸의 난

인종 4년(1126년), 이자겸의 난은 왕실의 외척 이자겸이 십팔자위왕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 사건이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들을 예종(순덕왕후)과 인종(연덕궁주, 복창원주)에게 왕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독재 정치를 한다. 그러나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려 했고, 이로 인해 갈등이 심화된다. 1126년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김인존, 지녹연, 최탁 등과 함께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을 죽인다. 그러자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분노한 척준경의 사병과 승려 의장의 승군 300여 명은 왕궁을 침범하여 최탁, 황관 등 17명이 살해하고 지녹연 등을 유배 보낸다. 그리고 인종을 이자겸의 집인 중흥택에 유폐시킨다. 겁에 질린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 조서를 내리지만 이자겸의 재종형 이공수가 강력하게 반대한다. 얼마 후 인종은 최사전의 계략으로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결국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체포되어 유배되고, 그의 두 딸은 폐비되어 출궁 한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고려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묘청의 난의 배경이 된다. 이 사건은 고려 중기의 정치적 혼란과 귀족 사회의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묘청의 난

인종 13년(1135년), 묘청의 난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회복에 공을 세운 승려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의 서경 세력들이 서경천도 계획이 무산되자 서경(평양)에서 1년여 동안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들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개경은 지덕이 쇠약해졌으니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서경천도론'과 여진족의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금국정벌론'을 주장하며, 국호를 "대위(大爲)"로, 연호를 "천개(天開)"로 정하고 자주적이고 강력한 독립 국가를 선언한다. 결국 묘청의 서경파들은 김부식의 개경파에 의해 진압되고,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론은 좌절된다. 이 사건은  고려 중기의 정치적, 사상적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묘청의 서경파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김부식의 개경파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을 독립운동가 신채호"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으로 평가하며, 묘청의 난을 통해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주의 사상이 패배하고,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보수 사상이 득세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만약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의 역사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문과 문화 진흥

· 역사 편찬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명령하여 1145년에 완성한다. 또한 유학 부흥을 위해 국자감의 학제를 정비하고, 지방 교육을 위해 각 주현에 향학을 설립하여 학문과 교육을 진흥한다. 또한 서적소를 설치하여 유학 연구와 보급에 힘쓴다.

 

 

가족과 사망

· 가족

인종은 이자겸의 셋째 딸인 폐비  연덕궁주, 넷째 딸인 폐비 복창원주가 있었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폐위되었고, 제1비 공예왕후 임씨, 제2비 선평왕후 김씨의 4명의 부인이 있었다. 특히 복창원주는 인종의 이모인 동시에 부인으로 수차례 인종이 독살되는 위기에서 구해준다. 인종의 자식은 공예왕후 임씨에게서만 5남(의종 왕현, 대령후 왕경, 명종 익양공, 원경국사, 신종 평량공), 4녀(승경공주, 덕녕공주, 창락공주, 영화공주)를 얻는다. 

 

· 사망

1146년(인종 24년) 2월, 어린 나이 14세에 즉위하여 두 번의 큰 난을 겪은 인종은 갑자기 병이 들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장릉(長陵)으로 개성시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에 소재하고 있다. 그의 능에서 국보 제94호 청자참외모양꽃병이 출토되었다. 

 

 

주요 인물

· 김부식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은 고려 중기 인종 때의 문신, 학자, 정치가로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다. 인종 시기에는 여러 요직을 거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1126년 이자겸이 제거되자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참지정사를 거쳐 1132년에는 중서문하평장사가 된다.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개경 중심의 정치 질서를 유지한다. 또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당시 송나라의 문화를 고려에 소개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유교적 학문을 바탕으로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는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자주적이고 민족주의적 입장을 억압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는다. 또한 조정에서 퇴직한 김부식은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 시대의 역사를 유교적 관점에서 정리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 완성한다(1145년). <삼국사기>는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총 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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